아버지는 못마땅해하며 토르를 돌아봤지만 뭐라 말도 꺼내기 전에 토르가 입을 열었다.
“아버지, 부탁 드려요. 아버지께 상의 드리고 싶은 일이 있어요!”
“광을 내라고 했지 않았느냐”
“부탁 드려요, 아버지!”
토르를 나무라며 노려보던 아버지였지만 끝내는 토르에게 용건을 물어봤다.
“뭔데 그러냐?”
토르의 표정에서 간절함을 느꼈음이 분명했다.
“저도 형들과 함께 왕의 부대에 지원하게 허락해주세요.”
형제들이 토르의 뒤에서 박장대소를 터트렸고 덕분에 토르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러나 아버지는 웃지 않았을뿐더러 오히려 인상을 더 찌푸렸다.
“너도?”
토르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이제 열네 살이에요. 지원 연령이 됐다고요.”
“열네 살부터 지원할 수는 있지.”
드레이크가 어깨너머로 얕보며 받아 쳤다.
“네가 뽑힌다는 건, 가장 어린 사람을 뽑는다는 건데. 왕의 부대가 너보다 다섯 살이나 많은 나를 놔두고 너를 뽑는다고?”
“무례하기 짝이 없군, 넌 늘 그랬어.”
덜스가 거들었다.
토르는 뒤돌아 형제들을 마주했다.
“형들에게 묻는 게 아니잖아요.”
이내 다시 돌아본 아버지의 얼굴은 여전히 험악했다.
“아버지, 부탁 드려요. 제게도 기회를 주세요. 제가 바라는 건 그 뿐이에요. 비록 제가 어리긴 하지만 앞으로 차차 능력을 증명할게요.”
아버지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넌 전사가 될 인물이 못돼. 네 형제들과는 달라. 넌 그냥 목동으로 살면 된다. 네 인생은 모두 이곳, 내 옆에 있다. 넌 네 몫을 하고 네 형들은 형들의 몫을 하면 된다. 꿈은 분수에 맞게 꿔야지. 주어진 대로 인생을 받아들이고 그것에 충실하도록 하거라.”
토르는 눈 앞에서 모든 꿈이 사라지는 것만 같아 마음이 무너져 내렸다.
‘안돼, 이렇게 포기할 순 없어’라는 생각뿐이었다.
“하지만 아버지”
“시끄럽다!”
아버지의 날카로운 고함소리에 분위기가 험해졌다.
“네겐 더 할말 없다. 실버부대가 오고 있다. 저리 비키고, 그들이 당도하면 알아서 행동해.”
아버지는 앞으로 나서더니 토르가 무슨 거슬리는 물건이라도 되는 양 손으로 무심히 밀어버렸다. 아버지의 우람한 손바닥이 토르의 가슴팍을 밀쳐냈다.
마을에 요란한 소음이 일어났고 덕분에 마을 사람들이 일제히 몰려나와 거리의 양쪽을 메웠다. 뿌연 먼지가 마차의 도래를 알리더니 얼마 후 천둥 소리 같은 엄청난 소음과 함께 여러 대의 마차가 각각 열두 필의 말에 이끌려 당도했다.
마치 불시에 습격하는 군대처럼 나타난 마차들이 정차한 곳은 토르의 집 근처였다. 말들은 주변을 의기양양하게 뛰어다니며 울어댔다. 뿌연 먼지가 가라앉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소요됐다. 토르는 애타는 마음으로 실버들의 갑옷과 무기를 보기 위해 애를 썼다. 태어나 처음으로 실버를 이렇게까지 가까이서 보게 되자 심장이 요동쳤다.
선두에서 말을 이끌던 실버대원 한 명이 말에서 내렸다. 실버가 왔다. 반짝이는 고리 갑옷에 긴 검을 허리에 찬 저자가, 다름아닌 실버였다. 30대의 나이에 덥수룩한 수염과 뺨에 보이는 여러 흉터, 전장에서 얻은 것 같은 휘어진 코는 진정 사내다운 면모를 자랑했다. 토르는 지금껏 그렇게 큰 체구를 본 적이 없었다. 어깨는 남들보다 두 배나 넓었고 용모로만 보아도 그가 총 책임자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실버 대원은 먼지가 가득한 땅에 발을 내디뎠다. 줄지어 서있는 소년들을 향해 걸을 때마다 그의 신발 뒤축에서 딸랑딸랑 소리가 났다.
마을 곳곳에서 모인 소년들은 간절한 마음으로 차려 자세를 하고 있었다. 실버 대원이 되는 것이야말로 명예와 영예와 영광과 전장의 삶을 사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토지, 명성, 재물은 부수적으로 따라왔다. 최고의 신붓감과 최상의 토지, 빛나는 영광이 보장된 삶이었다. 가족 중에 실버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영광스런 일이었다. 그리고 이런 실버가 되기 위한 첫 수순은 우선 왕의 부대에 선발되는 것이었다.
토르는 커다란 황금 마차들을 유심히 살폈고 그 안에 탈 수 있는 지원자들의 자리가 이제 몇 남지 않았다는 걸 이내 눈치챘다. 왕국의 영토가 매우 넓었기에 실버부대는 이미 그만큼 많은 마을들을 돌고 오는 길이었다. 징병이 예상보다 더 어렵고 치열할거란 현실에 침이 꼴깍 넘어갔다. 여기 모인 소년들이 모두 경쟁 상대였고 토르의 형들을 비롯한 웬만한 지원자들 모두 상당한 싸움 실력의 소유자들이었다. 토르는 불길한 예감을 떨쳐낼 수 없었다.
실버 대원이 가능성이 있을만한 지원자를 찾아 조용히 걷는걸 보고 있자니 숨을 쉬기조차 힘들었다. 대원은 길 끝에서 시작해 천천히 원을 돌며 돌았다. 모두 토르가 잘 알고 있는 소년들이었다. 이들 중 일부는 가족들의 전폭적인 지지와 응원에도 불구하고 왕의 부대에 선발되지 않기를 바라고 있었다. 스스로 전사로서의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했기에 이들에게는 징병이 두려울 뿐이었다.
토르는 모욕감을 느꼈다. 자신이야말로 여기 있는 그 누구보다 더 선출될만한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다. 단지 형들이 토르보다 나이가 많고 체구가 크고 힘이 세다는 이유만으로 토르가 징병에 지원할 권리조차 박탈하는 건 너무도 억울한 일이었다. 순간 아버지에 대한 분노가 솟구쳤다. 실버 대원이 토르의 집 근처로 다가섰을 무렵 토르는 어느새 몸까지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실버 대원이 처음으로 걸음을 멈췄다. 토르의 형제들 앞이었다. 대원은 형제들을 위아래로 살펴보고 흡족해 했다. 이내 형제 한 명의 칼집에 손을 뻗더니, 얼마나 단단한지를 시험이나 하듯 확 잡아 당겼다.
그는 이내 미소를 지었다.
“자네는 전장에서 검을 사용해본 경험이 없겠지, 맞는가?”
대원이 질문한 사람은 드레이크였다.
드레이크는 침을 꿀꺽 삼켰다. 토르에게는 처음으로 드레이크가 긴장한 모습을 본 순간이었다.
“없습니다, 주군. 그러나 훈련은 많이 했습니다. 그래서 아마도”
“훈련!”
대원은 크게 폭소하며 몸을 뒤로 돌렸고 면전에서 드레이크를 비웃는 나머지 실버대원들과 시선을 교환했다.
드레이크의 얼굴이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드레이크가 당황하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주로 사람들을 당혹스럽게 만드는 건 드레이크의 몫이었다.
“그렇다면 난 적군들에게 훈련이나 하며 검을 휘둘러본 자네를 두려워하라고 말해야겠군!”
대원들은 다시 한번 웃어댔다.
실버 대원은 다음으로 토르의 다른 형제를 눈여겨봤다.
“지원자 세 명이 형제였군.”
그는 턱에 난 수염을 만지작거렸다.
“쓸모 있겠군. 모두 체구가 좋고. 검증되진 않았지만 강해 보이고. 선발되려면 훈련이 많이 필요하긴 하겠군.”
대원은 잠시 망설였다.
“자리가 있지 않을까 싶은데.”
대원은 고개를 움직여 마차의 뒤를 가리켰다.
“올라타, 빨리. 마음 바뀌기 전에.”
환희에 가득 찬 세 형제는 재빨리 마차에 올라탔다. 토르의 시선에 덩달아 기뻐하는 아버지의 모습이 들어왔다.
형제들이 선출되는걸 보고만 있자니 침울했다.
대원은 다음 집을 향해 발길을 돌렸다. 토르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주군!”
아버지가 토르를 노려봤다. 그러나 토르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대원은 가던 길을 멈추고 천천히 돌아섰다.
토르는 앞으로 두 걸음 나섰다. 심장이 쿵쾅거렸지만 할 수 있는 한 최대로 가슴을 앞으로 내밀었다.
“저도 한번 봐주십시오, 주군.”
잠시 놀란 대원은 상대해줄 가치도 없다는 듯 토르를 위아래로 훑었다.
“내가 안 봤었나?”
대원은 토르에게 반문하며 웃음을 터트렸다.
다른 대원들도 웃어댔다. 그러나 토르는 신경 쓰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이 그에겐 전부였다. 지금이 아니면 다신 기회가 없었다.
“왕의 부대에 선발되고 싶습니다.”
대원은 토르에게 다가갔다.
“지금 나이가?”
대원은 상황을 즐기고 있었다.
“열네 살이 되긴 했나?
“네, 주군. 2주 전에 생일이 지났습니다.”
“2주 전이라고!”
대원은 폭소를 터트렸고 나머지 대원들도 한바탕 웃어댔다.
“그렇다면 우리의 적들은 모두 자네를 보고 벌벌 떨겠군.”
토르는 가슴속에서 모멸감이 차 올랐다. 무엇이라도 해야 했다. 결코 이렇게 끝내버릴 수 없었다. 대원이 뒤돌아 걸어갔다. 그러나 토르는 그를 그렇게 보낼 순 없었다.
토르는 앞으로 나와 소리쳤다.
“주군! 지금 큰 실수를 하시는 겁니다!”
대원이 다시 한번 멈춰 서서 몸을 돌리자, 사람들 속에서 탄성이 퍼져나갔다.
대원의 인상이 험악해졌다.
“미련한 것, 당장 집으로 들어가!”
아버지는 토르의 어깨를 잡고 재촉했다.
“싫어요!”
토르는 소리를 지르며 아버지의 손을 떨쳐냈다.
대원은 다시 토르에게 다가왔고, 이에 아버지는 뒤로 물러섰다.
“실버를 조롱하면 어떠한 처벌을 받는지 알고 있느냐?”
주체할 수 없이 심장이 요동쳤지만 토르는 물러서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용서해주십시오 주군, 아직 어린아이입니다.”
토르의 아버지가 나섰다.
“네게 묻지 않았다.”
대원은 위화감이 가득한 얼굴로 토르의 아버지가 나서는걸 막았다.
대원은 다시 토르에게 몸을 돌렸다.
“대답해!”
토르는 말을 잃은 채 침을 삼켰다. 그가 예상한 상황은 이런 게 아니었다.
“실버를 모욕하는 일은 왕을 모욕하는 일과 다름없다.”
토르는 기억을 더듬어 나지막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렇다, 즉 네게 채찍질 마흔 번의 형벌이 내려질 수 있다는 뜻이지.”
“주군을 모욕하려던 건 아니었습니다. 단지 선발되고 싶었습니다. 부탁 드립니다. 일평생 꿈꿔온 일입니다. 저도 데려가 주세요.”
대원은 토르의 얼굴을 한참 바라보더니 천천히 인상을 풀었다. 침묵 끝에 대원은 고개를 저었다.
“자네는 젊다. 그리고 당당하다. 그러나 아직은 아니야. 좀 더 성숙해지면 찾아오도록.”
이 말을 남긴 뒤, 대원은 다른 소년들에게 눈길조차 제대로 주지 않고 재빨리 말에 올라탔다.
의기소침해진 토르는 떠나는 마차를 우두커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마차는 처음 등장할 때와 마찬가지로 빠른 속도로 사라졌다.
마지막으로 토르의 눈에 들어온 건 마차에 실려가는 세 형들이었다. 마차에 몸을 실은 그들은 못마땅한 얼굴로 토르에게 조롱을 퍼부었다. 그렇게 토르의 눈앞에서 형제들은 떠나갔다. 이곳에서 멀리, 보장된 삶을 향해.
죽을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거리를 꽉 메웠던 마을 사람들은 볼거리가 사라지자 서둘러 집으로 돌아갔다.
“네가 얼마나 무모했는지 알기나 하느냐, 머저리 같은 것아”
아버지는 순식간에 토르의 양 어깨를 움켜 쥐었다.
“너로 인해 네 형들마저 잘못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안 했느냐?”
이에 토르는 거칠게 손을 휘저어 아버지의 두 손을 치웠지만, 아버지는 다시 목덜미를 쥐고 손등으로 토르의 얼굴을 때렸다.
따끔함에 순간 토르는 아버지를 노려보았다. 처음으로 아버지를 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꾹 참았다.
“가서 양들을 데려와. 지금 당장! 그리고 오늘 식사는 꿈도 꾸지 말거라. 오늘 저녁은 굶어. 대신 오늘 네가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곰곰이 반성하거라.”
“아예 안 돌아오는 게 좋겠네요!”
토르는 집을 나와 재빨리 언덕으로 발길을 재촉했다.
“토르야!”
아버지가 큰소리로 외치자 거리에 남아있던 마을 사람들이 길을 가다 멈춰 서서 쳐다봤다.
토르의 빠른 걸음은 점점 속도가 붙어 달리기로 이어졌다. 가능하다면 이 곳에서 최대한 멀리 가고 싶었다. 토르는 울고 있다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단 하나의 꿈이 산산조각 났다는 사실에 눈물 범벅이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제 2장
분노에 잠긴 토르는 몇 시간이 넘도록 이곳 저곳으로 언덕들을 배회했다. 그러다 결국엔 언덕 위에 주저 앉아 두 팔로 무릎을 감싸고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마차가 사라지며 남긴 흙먼지가 모두 다 없어질 때까지 오랜 시간을 지켜봤다.
더 이상 마을에 방문객이 찾아올 리 만무했다. 토르는 또다시 이 작은 마을에서 행여 찾아올지 모를 실버부대를 기다리며 기약 없는 몇 년을 보내야 했다. 그마저도 만에 하나 아버지의 허락을 받아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이제 집에 남겨진 사람은 토르와 아버지, 단 둘뿐이었다. 앞으로 토르에게 노여움을 고스란히 드러낼 아버지의 모습이 눈에 훤했다. 또다시 아버지의 종 노릇이나 하며 살다가 시간이 흐르면 어느새 토르도 아버지 같은 인생을 살게 될 게 뻔했다. 나머지 형제들이 명예를 얻는 동안, 토르는 작은 마을에 갇혀 초라하고 천한 삶에 안주해야 했다. 갑자기 분노로 피가 솟구쳤다. 이건 토르가 꿈꾸던 삶이 아니었다. 분명 아니었다.
토르는 이 상황을 바꿀 수만 있다면 뭐든 하고 싶었다. 묘안을 찾기 위해 머리를 쥐어 짰다. 그러나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에게 주어진 삶이란 고작 이런 것이었다.
몇 시간을 앉아있다 결국 낙담한 채 일어나 익숙한 마을 언덕들을 이리저리 가로질렀다. 어느새 토르는 마을의 가장 높은 언덕을 향하고 있었다. 그곳에 도착하니 첫 번째 태양은 이미 하늘 밑으로 자취를 감추고 있었고, 두 번째 태양은 하늘 가장 높은 곳에 솟아 초록 빛을 내뿜고 있었다. 아무 생각 없이 느릿느릿 걸으며, 허리 춤에서 오랜 사용으로 보기 좋게 바랜 가죽 장식 끈을 풀었다. 토르는 다시 손을 뻗어 허리에 연결된 주머니 속에 손을 넣었다. 그리고는 그 동안 좋다 하는 개울가에서 하나하나 수집해둔 매끄러운 작은 돌멩이들을 손가락으로 쓸었다. 가끔씩 토르는 돌멩이로 새총을 쏴 날아가는 새를 맞췄다. 그러나 보통은 쥐를 겨눴다. 몇 년 동안 거듭하며 몸에 익힌 습관이었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맞추지 못했다. 그런데 어느 날 움직이는 목표물을 맞췄고 그 이후부턴 뭐든 명중시켰다. 이젠 뗄래야 뗄 수 없는 취미가 돼버렸다. 새총을 쏘며 마음 속 분노도 떨쳐냈다. 형들이 검을 휘둘러 통나무를 벨 수 있을진 몰라도 돌멩이 하나로 날아가는 새를 명중시키는 건 어림없는 일이었다.
토르는 자신도 모르게 새총에 돌을 채우고 최대한 뒤로 잡아 당긴 뒤 온 힘을 다해 쏘았다. 마음속의 목표물은 아버지였다. 돌은 꽤 멀리 떨어진 나뭇가지를 명중시켰고 덕분에 나뭇가지가 힘없이 꺾여나갔다. 돌을 던져 생명까지도 위태롭게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토르는 더 이상 살아있는 생명체를 겨냥하지 않았다. 자신의 능력이 오히려 두려웠고 그 누구도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선택한 목표물은 오로지 나뭇가지뿐 이였다. 단, 양떼 주변에 여우가 접근할 때는 예외였다. 점차 토르의 양떼 주변에는 그 어떤 여우일지라도 얼씬조차 못했고, 덕분에 양떼들은 마을에서 가장 안전하게 방목됐다.
지금쯤 형들이 어디쯤 있을까 생각하니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왕실에 당도하기까지는 꼬박 하루가 걸렸다. 형들의 향후가 눈 앞에 절로 펼쳐졌다. 최대한 옷을 차려 입고 나온 사람들의 대대적인 축하와 환영인사를 받으며 왕궁에 당도하는 형들의 모습이 그려졌다. 형들은 전사들의 환영을 받는다. 다름아닌 실버부대 대원들의 환영을. 형제들은 왕의 부대에 최종 선발되고 부대 막사에서 생활하며 왕실 훈련장에서 가장 좋은 무기로 훈련을 받을 것이다. 각자 실버의 후원을 받는 후견부대원이 되고 언젠가는 실버가 되어 전용 말과 갑옷을 하사 받는 대지주가 될 것이다. 그럼 형들은 모든 축제와 왕의 만찬에 빠지지 않고 초대를 받게 된다. 매력적인 삶이 아닐 수 없었다. 토르는 이 모든걸 놓친 것이다.
전신에 고통이 전해졌다. 마음 속으로 꾹꾹 누르려 했으나 맘처럼 되지 않았다. 마음 깊은 곳 어딘가에서 스스로에게 외쳐댔다. 절대 포기하지 말라고. 진정 자신에게 주어진 삶은 이보다 더 멋지다고. 그 삶이 정확이 어떤 것인지 알 순 없었지만 분명한 건 이곳에서는 이룰 수 없다는 것이었다. 토르는 자신이 남들과 다르다는 걸 언제나 느끼며 살았다. 특별한 존재라고도 생각했다. 그래서인지 그 누구에게서도 이해 받지 못하고 과소평가됐다.
가장 높은 언덕에 오른 토르는 양떼를 찾아봤다. 훈련이 잘 된 양들은 다 함께 무리 지어 있었고 그곳에 있는 풀을 닥치는 데로 만족스럽게 뜯어먹고 있었다. 털에 염색해 둔 빨간 표식을 확인하며 양들을 하나하나 셌다. 그러나 토르는 양의 수를 모두 확인하고는 흠칫할 수 밖에 없었다. 한 마리가 모자랐다.
반복해서 세고 또 세었다. 믿기 힘들었지만 한 마리가 없어졌다.
토르는 지금까지 한번도 양을 잃어버린 적이 없었다. 게다가 양을 잃어버리면 아버지가 토르를 가만 놔둘 리가 없었다. 아버지도 아버지지만 이 황무지에 양 한 마리가 속수무책으로 길을 헤맨다는 생각에 토르는 더욱 속이 상했다. 무고한 생명이 고통 받는 건 그에겐 정말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언덕 가장 높은 곳으로 황급히 올라 저 멀리 수평선까지 늘어진 여러 언덕들을 살피며 빨간 표식을 등에 품은, 홀로 된 양을 찾아보았다. 사라진 양은 무리들 중에서 가장 야생성이 강한 놈이었다. 양은 이미 멀리까지 도망친 상태였다. 게다가 수많은 장소 중에서도 다름아닌 서쪽 다쿠우드로 향하고 있었고, 이에 토르의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침을 꿀꺽 삼켰다. 다크우드는 양뿐만 아니라 사람의 출입도 금지된 곳이다. 마을의 경계 너머에 있을뿐더러 걸음마를 떼기 시작할 때부터 절대 가면 안 되는 곳이란 걸 학습했다. 차마 가볼 엄두도 못 냈다. 전설에 따르면 그곳엔 미로 같은 숲과 사악한 동물들로 가득해 결국 죽어서야 헤어나올 수 있는 곳이라고 했다.
갈등에 휩싸인 토르는 다크우드 위에 펼쳐진 어둑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양을 그렇게 죽게 놔둘 수 없었다. 당장 서두른다면 다크우드에 가기 전에 양을 데려올 수 있을지 궁금했다.
마지막으로 양의 위치를 살핀 후 어둑한 하늘로 뒤덮인 다크우드를 향해 서쪽으로 재빠르게 뛰었다. 마음은 무겁게 철렁 내려앉았지만 여전히 몸은 달리고 있었다. 이젠 되돌리고 싶어도 상황을 되돌릴 수 없었다.
마치 아주 무시무시한 악몽을 향해 돌진하는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