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와주세요!” 물 속에 빠진 부대원이 외쳤다.
“왕의 부대의 첫 번째 규칙이 뭐지?” 콜크 사령관이 살려달라는 부대원을 외면한 채 나머지 부대원들에게 고개를 돌리며 외쳤다.
토르는 그에 대한 답을 잘 알고 있었지만 물 속에 빠진 부대원에게 신경이 쓰여 제대로 대답할 수 없었다.
“도움이 필요한 동료를 돕는 것입니다!” 엘덴이 외쳤다.
“그럼 저 부대원은 도움이 필요한가?” 콜크 사령관이 물 속의 부대원을 가리키며 반문했다.
바다 속 부대원은 물에 잠겼다 올라오기를 반복하며 물 밖으로 손을 뻗었다. 나머지 부대원들은 모두 난간 위에 서 있었다. 바닷물에 뛰어들기엔 모두 너무 두려울 뿐이었다.
그 순간 토르에게 알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물 속에 빠진 부대원에게 온 신경을 집중하는 순간, 다른 모든 것들이 사라졌다. 토르는 더 이상 지체하지 않았다. 자신이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조차 못했다. 죽음의 바다, 바다 괴물, 성난 파도, 이 모든 것들이 머릿속에서 지워졌다. 토르가 생각할 수 있는 단 한 가지는 누군가의 생명을 구하는 것이었다.
토르는 난간에 올라 무릎을 구부렸고, 찰나의 망설임도 없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붉은 바닷물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공중에 몸을 던졌다.
제5장
개리스 왕은 대 연회장에서 선대 맥길 왕의 왕좌에 앉아 길고 부드럽게 조각된 원목 팔걸이를 쓰다듬으며 눈 앞의 광경을 마주했다. 웅장한 연회장 속에는 링 대륙의 곳곳에서 모여든 수 많은 군중들이 생애 최대의 행사, 개리스 왕이 운명의 검을 들어올릴 수 있을지, 그가 진정한 선택된 자인지를 직접 목격하기 위해 이곳에 모여있었다. 선대 맥길 왕이 어렸을 적, 운명의 검을 대중들 앞에서 공식적으로 들어보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직접 두 눈으로 목격할 기회가 없었고 따라서 그 누구도 오늘의 행사를 놓치고 싶어하지 않았다. 기대감과 흥분 감이 구름처럼 연회장을 떠도는 것 같은 분위기였다.
개리스 왕은 사람들의 기대감에 무기력해졌다. 계속해서 사람들이 몰려드는 걸 바라보며, 연회장이 발 디딜 수 없을 만큼 수 많은 인파로 북적 이는 걸 바라보며, 자문위원단들의 의견을 따랐어야 했던 건지, 그들 말대로 대 연회장에서 대중을 모아 놓고 운명의 검을 들겠다는 자신의 결정이 잘못된 판단이었는지 스스로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자문위원단들은 개리스 왕에게 검을 보관하는 별도의 비공개 실에서 의식을 진행하길 권했다. 만약 개리스 왕이 검을 드는 데 실패하면, 단지 몇 명만이 그 사실을 목격하는 데 그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개리스 왕은 아버지에게 충성했던 자문위원단들을 믿지 못했다. 또한 개리스 왕은 자문위원단들의 충고보다는 자신의 운명을 좀 더 자신했다. 따라서 왕국 전체가 자신의 위대한 능력을 직접 목격하길 바랬다. 자신이 선택된 자라는 걸 직접 확인시키고 싶었다. 그 순간을 모두의 눈 앞에 각인시키고 싶었다. 자신의 운명이 드러나는 그 순간을.
개리스 왕은 아주 우아한 모습으로 연회장에 입장했다. 자문위원단을 뒤로 대동하고 점잔을 빼며 한걸음 한걸음씩 내디뎠다. 머리 위로는 왕관을 이고 어깨에는 망토를 걸치고 두 손으로 왕권을 상징하는 홀을 들었다. 개리스 왕은 모두에게 자신의 아버지가 아닌, 자신이 바로 진정한 왕, 맥길 가의 왕이라는 사실을 인식시키고 싶었다. 개리스 왕의 예상과 같이, 그가 이 궁궐과 백성들을 자신의 소유물이라고 여기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소요되지 않았다. 개리스 왕은 이제 백성들이 그것을 몸소 느끼길 바랬다. 자신의 힘과 권력을 뽐내는 이 자리가 좀 더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지길 바랬다. 오늘 이후, 모든 사람들이 비로소 자신이 진정으로 선택 받은 자이자 진정한 왕이라는 걸 알게 될 것이다.
그러나 지금, 왕좌에 홀로 앉아있는 개리스 왕은 연회장 한 가운데에 곧 운명의 검이 놓일 무쇠 갈래가 천장에서 내리쬐는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모습을 보자 확신을 잃었다. 이제서야 자신이 치러야 할 의식의 무게가 버겁게 느껴졌다. 이젠 더 이상 뒤집을 수 없는 행보였고 되돌릴 수 없는 일이 되어버렸다. 만일 검을 들어올리지 못한다면? 개리스 왕은 이런 생각을 애써 지웠다.
저 멀리 한쪽에서 커다란 문이 끼이익 하는 소리를 내며 열렸다. 그러자 곳곳에서 흥분 섞인 쉿, 조용히 라는 소리가 울렸고 고조된 기대감으로 이내 연회장엔 침묵이 흘렀다. 힘이 아주 건장해 보이는 12명의 병사들이 다같이 운명의 검을 이고 그 무게를 견디기 힘든 듯 안간힘을 쓰며 연회장에 들어섰다. 건장한 병사들은 6명씩 나란히 이열 종대로 중앙에 검을 이고 아주 천천히, 한 발짝씩 내디디며 운명의 검을 연회장 내부로 이동시키고 있었다.
운명의 검이 서서히 다가오는 모습에 개리스 왕의 심장박동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한 순간, 개리스 왕은 자신감을 상실했다. 이렇게 건장한 체구의 병사 12명이 함께 들고서도 힘겹게 고군분투하며 겨우 이고 있는 저 검을 어떻게 들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개리스 왕은 이러한 생각을 곧 마음 속에서 지워버렸다. 어찌됐든, 운명의 검은 힘이 아닌 운명에 따라 들어올릴 수 있는 검이었다. 이내 개리스 왕은 자신이 왕좌를 지킬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은 운명에 따라 이 자리에 서 있고, 선대 맥길 왕의 장자로서 태초부터 왕위에 오를 운명을 타고 났음을 스스로에게 상기시켰다. 개리스 왕은 군중을 둘러보며 아르곤을 찾았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개리스 왕은 충동적으로 아르곤의 의견을 구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지금 이 순간이야말로 아르곤이 가장 필요한 순간이었다. 어째서인지는 알 수 없지만 지금 이 순간 아르곤 외에는 다른 누구도 생각이 나질 않았다. 그럼에도 역시 아르곤을 찾아내는 일은 불가능했다.
마침내, 12명의 병사들이 햇살이 비치는 연회장 한 가운데에 이르렀고, 무쇠 갈래 위에 운명의 검을 어렵사리 내려놨다. 운명의 검은 금속이 부딪히는 쨍그랑 소리를 연회장 가득 울려 퍼트리며 무쇠 갈래 위에 놓여졌다. 연회장은 완전한 침묵 속에 휩싸였다.
군중들은 본능적으로 두 갈래로 나뉘어 개리스 왕이 운명의 검으로 향하는 길을 만들었다.
개리스 왕은 이 순간 하나하나를 음미하며, 군중의 관심을 만끽하며 천천히 왕좌에서 몸을 일으켰다. 모든 이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집중되어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개리스 왕은 다시는 이렇게 왕국 전체의 완전하고 강렬한 집중을 받는 순간이 오지 않으리란 걸 잘 알고 있기에 자신의 움직임 하나하나에 더욱 신경 썼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이 순간을 셀 수도 없이 꿈꿔왔다. 그리고 지금 그는 이 순간을 맞이하고 있다. 최대한 오랜 시간 동안 이 순간을 음미하고 싶을 뿐이었다.
개리스 왕은 모두의 시선을 흠뻑 받으며 한걸음 한걸음씩 서서히 왕좌에서 내려왔다. 발 밑에 깔린 붉은 양탄자의 감촉이 무척이나 부드러웠다. 그는 그렇게 햇살이 내리쬐는 운명의 검으로 서서히 다가갔다. 걷고 있는 지금 이 순간이 꿈 속을 걷는 기분이었다. 그는 타인의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봤다. 꿈 속에서 수백만 번이나 검을 들어올린 덕에 이 양탄자 위를 걷는 자신의 모습이 익숙했다. 이 모든 것이 검을 들어올릴 자신의 운명을 말해주는 듯 했고, 지금 이 순간은 분명 운명을 향한 발걸음이었다.
그는 이 의식이 어떻게 진행될지 알고 있었다. 위엄 있는 모습으로 운명의 검에 다가가 한 손을 뻗어 검을 쥐고 순식간에 극적으로 운명의 검을 하늘 높이 들어올릴 것이다. 군중들은 놀라움을 숨지기 못하고 고개를 숙이며 자신을 선택 받은 자라고 칭할 것이다. 맥길 왕가의 가장 위대한 왕이자 영원히 링 대륙을 지배할 선택 받은 왕. 군중들은 이 모든 광경에 기쁨의 눈물을 흘릴 것이고, 개리스 왕에 대한 두려움으로 모두가 몸을 움츠리게 될 것이다. 군중들은 이러한 영광의 순간을 목격하고 선택 받은 자의 지배를 받는 시기에 태어난 것을 신에게 감사할 것이다. 군중들은 개리스 왕을 신처럼 숭배할 것이다.
개리스 왕은 운명의 검에 다가섰다. 검과의 거리는 이제 한 발짝뿐이었고 그는 마음 속 깊은 떨림을 느꼈다. 그는 내리쬐는 햇살 속으로 들어섰다. 기존에 수도 없이 검을 보와 왔음에도 불구하고 운명의 검이 내뿜는 아름다운 자태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까지 검에 가까이 다가서서 검을 바라본 건 처음이었고 스스로도 이 사실이 놀라웠다. 검은 강렬한 인상을 풍겼다. 길게 뻗어 빛을 발하는 칼날은 그 누구도 그 금속의 속성을 밝혀내지 못했으며, 검 자루는 그가 지금껏 보아왔던 검 중에서 가장 화려했다. 최고급 비단처럼 보이는 직물로 에워싸인 검 자루에는 온갖 보석이 박혀있었고 매의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한 발짝 더욱 가까이 다가서자 검의 주변으로 강력한 에너지가 뿜어져 나왔다. 덕분에 개리스 왕은 온 몸이 욱신거렸고 숨 쉬기가 불편했다. 이제 곧 검은 개리스 왕의 손에 쥐어지게 된다. 그는 하늘 높이 검을 치켜들 것이다. 전 세계가 볼 수 있도록 빛나는 태양 아래서 검을 들어올릴 것이다.
선택된 자, 개리스 왕, 영원한 통치자.
개리스 왕은 오른손을 뻗어 천천히 손가락으로 칼자루를 감쌌다. 온갖 종류의 보석들이 그의 손길에 전해지며 전율이 올랐다. 강력하게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가 그의 손바닥과 팔을 거쳐 온 몸에 흘렀다. 그간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힘이었다. 이 순간이야말로 자신을 위한 시간이었다. 그는 한 평생 이 순간만을 위해 존재했다.
검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나머지 한쪽 손도 함께 칼자루에 얹었다. 그는 두 눈을 감고 숨을 넘겼다.
신의 가호에 따라 제가 이 검을 들 수 있게 해주소서. 제게 신호를 보내주소서. 제가 진정한 왕이라는 걸 보여주소서. 제가 선택 받은 지도자라는 걸 보여주소서.
개리스 왕은 마음 속으로 기도했다. 완벽한 순간을 위한 신호를 기다리며 신의 응답을 기다렸다. 그러나 몇 초가 흐르고, 다시 몇 초가 흘렀지만 모든 군중이 모인 그 곳에서 신에게서는 어떠한 응답도 들을 수 없었다.
순간 개리스 왕의 눈앞에 자신을 노려보는 아버지의 모습이 나타났다.
공포에 질린 개리스 왕은 아버지의 모습을 떨치기 위해 감았던 두 눈을 번쩍 떴다. 심장이 요동쳤다. 끔찍한 징조가 아닐 수 없었다.
어찌됐든, 지금이 아니면 기회는 없었다.
개리스 왕은 몸을 굽혀 있는 힘을 다해 검을 들었다. 그가 가진 힘은 모두 쏟아 부었고 마침내 온 몸이 바들바들 떨리며 경련이 일어났다.
운명의 검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검이 아니라 지구를 들어올려야 하는 듯한 기분이었다.
개리스 왕은 더욱 힘을 가했고, 더욱 사력을 쏟고, 더욱 고군분투했다. 그는 한눈에도 낑낑거리며 악을 쓰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운명의 검은 한 치의 움직임도 없었다.
개리스 왕이 바닥에 쓰러지는 순간 연회장 곳곳에서 탄성이 일어났다. 몇몇 자문 위원단들이 개리스 왕에게 달려가 그의 안위를 살폈고 개리스 왕은 공격적으로 손을 저어 그들을 물렸다. 그는 난감한 모습으로 제 발로 다시 일어섰다.
굴욕감에 사로잡힌 개리스 왕은 군중들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할지 살피기 위해 주변을 둘러봤다.
군중들은 이미 몸을 돌려 연회장 밖으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개리스 왕은 그들의 표정에서 실망감을 엿봤다. 그들의 눈에 개리스 왕은 또 다시 실패를 안겨준 왕일 뿐이었다. 이제 온 세상이, 링 대륙의 모든 사람들이 그가 진정한 왕이 아님을 알게 됐다. 그는 선택된 맥길 왕이 아니었다.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저 왕위를 찬탈한 왕자일 뿐이었다.
개리스 왕은 부끄러움으로 달아올랐다. 그 어느 때보다 외로운 순간이었다. 그가 꿈꿔온 모든 것들이, 어린 시절부터 상상해온 모든 것들이 거짓이었다. 환상이었다. 그는 자신이 만들어낸 스스로의 이야기를 의심 없이 믿었다.
그리고 그 믿음이 스스로를 산산조각 냈다.
제6장
개리스 왕은 서둘러 자신의 집무실로 향했다. 그의 속은 말이 아니었다. 검을 들어올리지 못한 스스로에게 놀랐으며 앞으로의 결과를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고민했다. 속수무책이었다. 지금껏 7대의 선대 맥길 왕들이 들어올리지 못했던 운명의 검을 모두가 보는 앞에서 들어올리겠다고 생각한 자신이 어리석게 느껴졌다. 왜 스스로를 선대 왕들보다 우월하리라 생각했던 것인가? 왜 스스로는 다를 것이라 여겼던 것인가?
그는 짐작했어야 했다. 좀 더 신중했어야 했다. 스스로를 과대평가하지 말았어야 했다. 그저 아버지의 왕위를 계승한 것으로 만족했어야 했다. 왜 스스로를 몰아부친 것인가?
이제 그가 선택 받은 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만인이 알게 됐다. 이제 그의 통치는 이에 대한 영향을 받을 것이다. 아마도 이로 인해 자신이 아버지 암살의 배후라는 확신을 더욱 심어준 셈이 된 것일 수도 있다. 개리스 왕은 이미 자신을 바라보는 모든 이의 시선이 달라진 걸 느꼈다. 모두의 시선이 그를 꼭두각시 왕으로 여긴 듯 했으며. 모두의 시선이 이미 다음 왕을 맞을 준비를 하는 듯 했다.
더욱 비참한 건 바로, 생애 처음으로 스스로에 대한 확신을 잃은 것이었다. 그는 평생토록 자신의 운명을 확신했다. 자신이 아버지의 뒤를 이어 왕위를 계승하고, 링 대륙을 통치하며, 운명의 검을 들어올리는 선택 받은 자일 거라 믿었다. 이러한 그의 자만은 이제 송두리째 무너져버렸다. 이제 그는 모든 것에 확신을 잃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최악은, 검을 들어올리기 전 눈앞에서 지워지지 않던 아버지의 모습이었다. 검을 들지 못한 건 아버지의 복수인 것일까?
“브라보,” 어디선가 누군가가 냉소적으로 말을 건넸다.
혼자였다 생각했던 개리스 왕은 흠칫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목소리의 주인공을 한번에 알아챘다. 지난 수 년간 익숙하게 들었던 그가 경멸하는 인물, 부인의 목소리였다.
헬레나.
그녀는 집무실 한쪽 구석에서 아편이 담긴 파이프를 피우며 개리스 왕을 주시했다. 아편 연기를 깊숙이 빨아들인 뒤 숨을 참고 다시 연기를 천천히 뱉어냈다. 헬레나 왕비의 두 눈은 충혈되어 있었다. 개리스 왕은 그녀가 아편 파이프를 지나치게 많아 피웠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여기서 뭘 하는 것이오?” 개리스 왕이 물었다.
“여기 우리 집무실이잖아요,” 그녀가 대답했다. “여기선 뭐든 내가 원하는 대로 할 수 있어요. 난 당신 부인이자 왕비이니. 잊지 마요. 나도 당신처럼 이 왕국을 지배하는 인물이니까. 그리고 오늘 당신의 커다란 패배로 말미암아, 지배 라는 말은 아무나 사용해도 된다고 생각하니까요.”
개리스 왕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헬레나 왕비는 언제나 개리스 왕이 가장 힘들고 상황이 부적절한 시기에 그에게 큰 타격을 줬다. 그는 이 세상 그 어떤 여인보다 자신의 부인을 혐오했다. 둘의 결혼에 동의했던 스스로를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런가?” 개리스 왕이 몸을 돌려 침을 뱉고는 분노하듯 그녀에게 다가섰다. “내가 왕이라는 사실을 잊었나 본데, 아가씨, 네가 내 부인이든 아니든 왕국의 모든 사람과 마찬가지로 난 널 구금시킬 수 있어.”
헬레나 왕비는 조롱 섞인 콧방귀를 끼며 개리스 왕을 비웃었다.
“그럼 어떻게 될까?” 헬레나 왕비가 반문했다. “네 백성들이 너의 성 정체성을 의심하지 않을까? 아마도, 매우 그렇겠지. 그건 개리스란 인간이 계획한 일에 어긋나지. 그 누구보다 다른 이의 시선을 중시하는 남자에게는.”
개리스 왕은 헬레나 왕비 앞에 멈춰 섰다. 그녀가 언제나 자신을 꿰뚫어본다는 생각에 마음 속 깊이 심기가 불편했다. 개리스 왕은 그녀의 협박에 수긍했고 그녀와 말다툼을 해봐야 소용없는 일이라는 걸 이내 깨달았다. 그런 이유로 개리스 왕은 그곳에 서서 조용히 화가 가라앉길 기다리며 주먹을 움켜 쥐었다.
“바라는 게 무엇이오?” 개리스 왕은 분노를 애써 누르며 천천히 말을 걸었다. “당신은 원하는 게 있을 때만 날 찾지 않소.”
그녀는 짧게 조롱 섞인 웃음을 날렸다.
“내가 원하는 게 있으면 내가 직접 가져요. 당신에게 무언가를 요구하러 온 게 아니라고요. 대신 이야기 좀 하러 왔죠. 당신의 왕국 전체가 운명의 검을 들어올리지 못한 당신의 모습을 봤어요. 이제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거죠?”
“우리 라니?” 개리스 왕은 그녀의 의중을 헤아리지 못해 반문했다.
“이제 당신의 백성들도 내가 알고 있는 사실을 알게 됐잖아요. 당신이 패배자라는 사실이요. 당신이 선택 받은 자가 아니라는 사실이요. 축하해요. 이제 이건 공식 사실이 됐네요.”
개리스 왕은 인상을 가득 썼다.
“내 아버지도 운명의 검을 들어올리진 못했소.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왕국을 제대로 통치하지 못한 건 아니었잖소.”
“그렇지만 왕권에는 영향을 받았죠,” 헬레나 왕비가 조롱하며 맞받아쳤다. “매 순간 순간마다요.”
“그렇게 내 무능력이 싫으면,” 개리스 왕은 씩씩대며 말했다. “이 곳을 왜 떠나지 않소? 날 떠나시오! 우습지도 않은 이 결혼을 끝내시오. 난 이제 왕이오. 그 누구도 더 이상 필요 없소.”
“그 말을 꺼내줘서 기쁘네요,” 헬레나 왕비가 대답했다. “그게 바로 제가 이곳에 온 이유에요. 당신이 공식적으로 우리의 결혼생활을 끝내줬으면 해요. 이혼해요. 사랑하는 남자가 있어요. 진짜 남자요. 사실, 당신의 기사 중 한 명이에요. 그는 전사에요. 우린 서로 사랑해요. 진심이에요. 지금껏 만난 사람들과는 달라요. 더 이상 이 관계를 숨기지 않을 수 있도록, 이혼해줘요. 제 사랑을 공개하고 싶어요. 그리고 그와 결혼하고 싶어요.”
개리스 왕은 놀라움을 금치 못한 채 멍하니 왕비를 바라봤다. 심장에 단검이 파고드는 것만 같았다. 왕비는 왜 지금 이 이야기를 꺼낸 것인가? 왜 그 많은 순간 중 지금인가? 너무 버거웠다. 쓰러져 있는 자신에게 세상이 시련을 주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