Морган Райс - 용의 숙명 ст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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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개리스 왕이 자신이 왕비에게 감정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왕비가 실제로 이혼을 거론했을 때 무언가를 느꼈다. 분노가 치밀었다. 자기도 모르게 그녀와의 이혼을 원치 않는 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만약 개리스 왕이 먼저 이혼을 거론했다면, 괜찮았을 것이다. 그러나 왕비가 거론했기에, 이야기는 달라질 수밖에 없다. 그는 왕비가 손쉽게 원하는 걸 갖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 무엇보다 이혼이 왕권에 어떤 영향을 줄지 알 수 없었다. 이혼한 왕이라는 사실에 수 많은 질문이 쏟아질 것이 뻔했다. 더불어 개리스 왕은 자신도 의식하지 못한 채, 왕비가 사랑한다는 전사에게 질투가 났다. 또한 자신의 면전에서 남편으로서 부족한 남성성을 지적하는 왕비에게 분노했다. 그는 앙갚음을 해주고 싶었다. 두 사람 모두에게.

“이혼은 못해주오,” 개리스 왕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당신은 나에게 묶어있소. 영원히 내 부인으로 살아야 하오. 당신에게 절대 자유란 없을 것이오. 또한 내가 만약에라도 그 전사를 보게 된다면, 그를 고문하고 처형할 것이오.”

헬레나 왕비는 개리스 왕에게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난 당신 부인이 아니야! 당신 또한 내 남편이 아니지. 당신은 남자가 아니야. 이 결혼은 불성실한 결합일 뿐이야. 처음부터 그래왔어. 권력을 위해 계획된 협정일 뿐이야. 이 모든 것이 역겨워. 늘 그랬어. 그리고 이것 때문에 난 진정한 결혼생활을 할 기회를 박탈당했지.”

왕비가 숨을 골랐지만 그녀의 분노는 더해졌다.

“이혼을 해 줘야 할거야, 그렇지 않으면 당신이 어떤 남자인지 왕국 전체에 고할 테니까. 당신이 결정해.”

이 말을 남기고 헬레나 왕비는 뒤돌아 걸어나갔다. 열려있는 방문을 나서며 다시 문을 닫는 수고도 잊었다.

개리스 왕은 석조 건물에 홀로 남아 왕비가 지나간 자리마다 울려 퍼지는 발자국 소리를 들었다. 온 몸에 찬 기운이 들었음에도 차마 몸을 떨 수가 없었다. 이제 그가 붙잡을 수 있는 안정적인 것이 있을까?

개리스 왕은 열려있는 방문을 바라보며 몸을 떨었다. 그는 이내 누군가 이곳으로 걸어오는 것을 보고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때마침 펄스가 나타나 개리스 왕은 헬레나 왕비와의 대화를 충분히 심사숙고 할 시간을 놓쳤다. 그녀의 협박을 제대로 가늠해볼 시간을 갖지 못했다. 펄스는 특유의 방정맞은 걸음걸이 대신 죄지은 표정으로 조심스럽게 집무실에 들어섰다.

“개리스?” 펄스는 확신 없는 어조로 말을 건넸다.

눈을 크게 뜨고 자신을 주시하는 펄스를 보자 개리스 왕은 그가 얼마나 속상한지 알 수 있었다. 그는 반드시 속상해야 한다고 개리스 왕은 생각했다. 어찌됐든, 운명의 검을 들라고 설득한 것도 펄스였고 자신을 능력 이상의 사람이라 헛바람을 넣은 것도 펄스였다. 펄스의 속삭임이 아니었다면, 누가 알았을까? 개리스 왕은 운명의 검을 들 시도조차 안 했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개리스 왕은 분개하며 펄스에게 향했다. 그는 드디어 자신의 분노를 표출할 마땅한 대상을 찾았다. 누가 뭐라 해도, 자신의 아버지를 살해한 사람은 펄스였다. 이 모든 상황에 처하도록 만든 사람은 바로 이 바보 같은 펄스였다. 이제 개리스 왕은 또다시 선택 받지 못한 맥길 왕가의 왕일 뿐이었다.

“널 증오해,” 개리스 왕이 분개했다. “네 약속들은 지금 어떻게 됐지? 내가 운명의 검을 들어올릴 거라는 네 확신은?”

펄스는 매우 불안한 표정으로 침을 삼켰다. 아무 말을 하지 못했다. 정확하게, 아무 할 말이 없었다.

“죄송합니다, 폐하,” 펄스가 대답했다. “제가 틀렸습니다.”

“넌 많은 걸 틀리지,” 개리스 왕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사실, 생각하면 할수록 펄스는 모든 걸 망쳐놨다. 실제로 펄스만 아니었다면, 자신의 아버지는 아직도 살아있었을 것이다. 그럼 개리스 왕은 이 엉망인 상황 속에 놓여있을 필요도 없었다. 왕권의 무게 또한 감당할 필요가 없었고 이 모든 것이 잘못 될 리가 없었다. 개리스 왕은 단순했던 과거가 그리웠다. 아버지께서 살아 계시던, 자신이 왕이 아닌 시절이 사무쳤다. 그 모든걸 다 되돌리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던 그대로 되돌리고 싶었다. 그러나 불가능했다. 이 모든 것을 원망할 펄스만이 눈 앞에 있을 뿐이었다.

“여기서 뭘 하는 거지?” 개리스 왕은 펄스를 압박했다.

펄스는 목청을 가다듬었다. 불안한 모습이 역력했다.

“저는 소문을…시중들이…떠드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폐하의 누이와 형제 분이 여기저기 파헤치고 다닌다는 이야기가 제 귀에까지 들렸습니다. 두 사람은 하인들이 일하는 곳에서 목격됐습니다. 살인 무기를 찾으려고 오물 통을 수색했답니다. 제가 폐하의 아버지를 암살할 때 사용한 단검이요.”

펄스의 한마디 한마디에 개리스 왕의 몸이 굳어갔다. 공포와 두려움이 온 몸을 마비시켰다. 이 보다 더 엉망인 하루가 있을 수 있을까?

개리스 왕은 헛기침을 했다.

“그들이 뭘 찾았지?” 개리스 왕은 바짝 마른 입으로 겨우 말을 뱉었다.

펄스는 고개를 가로 저을 뿐이었다.

“모르겠습니다, 폐하. 제가 아는 것이라고는 그 분들이 의심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개리스 왕은 스스로도 믿지 못할 만큼 펄스에게 증오심이 불타올랐다. 펄스의 갈팡질팡하는 태도만 아니었다면, 무기를 제대로 처리하기만 했더라면, 개리스 왕이 이러한 상황에 처할 리가 만무했다. 펄스 덕에 개리스 왕은 속수무책이었다.

“난 더 이상 같은 말을 반복하지 않을 거야,” 개리스 왕이 펄스에게 한 걸음 다가가며 입을 열었다. 그가 할 수 있는 한 가장 단호한 표정으로 펄스를 주시했다. “다시는 네 얼굴을 보고 싶지 않다. 알아 듣겠나? 이 곳을 떠나, 다시는 돌아오지 말거라. 왕실 밖으로 널 좌천 보내겠다. 만약 네가 이 성안에 발을 다시 디딘다면, 널 체포할 것이다.”

“당장 떠나!” 개리스 왕이 고함을 질렀다.

눈물을 가득 머금은 펄스는 뒤돌아 집무실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가 계단을 내려가는 발걸음 소리가 오래도록 울려 퍼졌다.

개리스 왕은 다시 자신에게 패배를 안겨준 운명의 검을 생각했다. 스스로 큰 재앙을 초래했다는 생각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스스로 절벽으로 자신을 몰아붙인 것 같았다. 지금 이 순간부터 그는 자신의 추락을 직면하게 될 뿐이었다.

개리스 왕은, 아버지의 집무실 석조 바닥 위 깊게 울리는 침묵 속에 홀로 서서 온 몸을 떨며 자신이 무슨 짓을 한 건지 생각했다. 이 보다 더 사무치게 외로울 순 없었다. 더 이상 스스로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이것이 왕의 자리인가?

*

개리스 왕은 서둘러 원형의 석조 계단을 올랐다. 성의 가장 높은 난간을 향해 황급히 한 층 한층 올라갔다. 신선한 공기가 필요했다. 생각을 정리할 시간과 공간이 필요했다. 왕국의 전망과 백성들이 잘 보이는 곳을 찾아야 했다. 그 모든 것이 자신의 소유물이라는 것을 상기시켜줄 공간이 필요했다. 오늘 일어난 모든 악몽 같은 일들에도 불구하고 어쨌든 그는 여전히 이 왕국의 왕이었다.

개리스 왕은 뒤를 따르는 시중들을 물리고 홀로 계단을 헐떡거리며 올라갔다. 그러다 중간에 멈춰 몸을 구부리고는 숨을 골랐다. 두 뺨에 그의 눈물이 타고 내렸다. 계속해서 매 순간마다 자신을 꾸짖는 아버지의 모습이 나타났다.

“당신을 경멸해요!” 그는 허공에 소리쳤다.

그의 외침에 그는 분명 조롱하는 듯한 웃음소리를 들었다. 아버지의 비웃음이었다.

개리스 왕은 그 공간을 벗어나야 했다. 그는 쉬지 않고 원형 계단을 올라 마침내 정상에 다다랐다. 눈 앞의 문을 박차고 나가자 신성한 여름 공기가 그를 맞이했다.

그는 깊게 호흡을 들이마신 뒤 한참 동안이나 숨을 참으며 따뜻한 바람과 햇살을 만끽했다. 개리스 왕은 어깨에 걸친, 한때 자신의 아버지가 걸쳤던 망토를 벗어 바닥에 내팽개쳤다. 날이 무더웠기에 더 이상 망토를 걸칠 이유가 없었다.

그는 석조 벽으로 이뤄진 난간의 가장자리로 서둘러 자리를 옮겨 거친 숨을 쉬며 왕국을 내려다봤다. 끝없는 인파가 성 밖으로 나가는 모습이 포착됐다. 오늘 행사에 참석했다 돌아가는 인파였다. 저 수 많은 인파가 모두 자신의 통치 아래 놓여있다는 사실에 경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것이 얼마나 갈 수 있단 말인가?

“왕좌란 재미있는 것이지요,” 깊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깜짝 놀란 개리스 왕이 뒤를 돌아보자 눈 앞에 아르곤이 보였다. 흰색 망토와 후드를 쓰고 지팡이를 든 채 한걸음 뒤에 떨어져있었다. 아르곤은 자신을 바라보는 개리스 왕을 바라봤다. 입가엔 미소가 있었지만 그의 눈빛에는 미소를 찾을 수 없었다. 아르곤의 두 눈은 불처럼 이글거렸고 개리스 왕을 꿰뚫어 보며 그를 한쪽으로 몰고 있었다. 그의 두 눈을 너무 많은 것을 목격했다.

개리스 왕은 아르곤에게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았다. 묻고 싶은 게 끝도 없었다. 그러나 운명의 검을 들어올리지 못한 지금 이 상황에서 그는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왜 미리 말해주지 않았는가?” 개리스 왕이 간절하게 물었다. “자네는 내가 선택 받은 자가 아님을 미리 말해줄 수 있지 않았나. 날 이런 수모로부터 막아줄 수 있었네.”

“왜 그래야 하는지요?” 아르곤이 반문했다.

개리스 왕은 인상을 찌푸렸다.

“당신은 왕의 진정한 조언자가 아니군,” 개리스 왕이 말했다. “내 아버지에게는 진정한 충고를 했을 망정, 내겐 그렇지 않구나.”

“아마도 폐하의 선왕께서는 진정한 조언을 누릴 자격을 갖췄던 거겠죠,” 아르곤이 대답했다.

개리스 왕의 분노가 더욱 깊어졌다. 그는 아르곤을 증오했다. 그리고 그를 원망했다.

“자네가 내 주변을 맴도는 걸 원치 않는다,” 개리스 왕이 말했다. “왜 선왕께서 자네를 곁에 두었는지 모르겠구나, 네가 왕국에서 떠나길 바란다.”

아르곤은 공허하면서도 무시무시한 웃음을 터뜨렸다.

“선왕께서 절 곁에 두신 게 아닙니다, 어리석은 자여,” 아르곤이 설명했다. “선왕의 선왕도 아니지요. 저는 이곳에 있어야 하는 운명을 받아들일 뿐입니다. 사실, 제가 그분들을 곁에 두었다고 정정해야겠지요.”

순간 아르곤은 개리스 왕 앞으로 바짝 다가가 그의 영혼을 꿰뚫어 보듯 그를 주시했다.

“폐하도 그렇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아르곤이 물었다. “폐하는 이곳에 있을 운명인가요?”

아르곤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개리스 왕의 신경을 강타했고, 개리스 왕은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아르곤이 던진 질문이야말로 개리스 왕 스스로가 궁금해했던 것이었다. 개리스 왕은 지금 아르곤이 자신을 위협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피로써 대위를 잇는 자는 피로써 지배한다,” 아르곤은 이 말을 남긴 채 뒤돌아 걸어갔다.

“기다리시오!” 개리스 왕이 소리쳤다. 아르곤이 사라지지 않길 바랬다. 그의 답이 필요했다. “그게 무슨 뜻이오?”

개리스 왕은 아르곤이 자신에게 오랜 시간 통치하지 못할 거라는 메시지를 전달한 것이라 여겼다. 아르곤이 정말 그런 의미로 자신에게 그런 말을 남긴 건지 확인해야 했다.

개리스 왕은 아르곤을 쫓아 달려갔다. 그러나 가까이 다가가자 아르곤은 눈 앞에서 사라졌다.

개리스 왕은 주변을 둘러봤으나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어디서 들려오는지 알 수 없는 공허한 웃음소리만이 들려올 뿐이었다.

“아르곤!” 개리스 왕지 다시 외쳤다.

개리스 왕은 다시 몸을 돌려 하늘 위를 바라봤다. 한쪽 무릎을 구부리고 머리를 뒤로 젖히며 그는 사력을 다해 외쳤다:

“아르곤!”

제 7장

에레크 명장은 공작과 브랜디트와 나란히 북적 이는 사바리아의 길을 걸었고 그들 뒤로는 수십 명의 수행단이 따랐다. 그들이 시녀의 집을 향해 거리로 나오자 그들을 보기 위한 인파가 더욱 거세졌다. 에레크 명장은 지체 없이 바로 그녀를 만나고 싶다고 고집했고 공작은 직접 에레크 명장을 시녀에게 안내하겠다고 했다. 공작이 나서는 길을 따라 군중들이 뒤를 이었다. 에레크 명장은 뒤를 잇는 수 많은 군중들을 보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고 한편으로는 수많은 구경꾼들을 대동하여 그녀의 집에 당도하게 되리란 생각에 꽤나 민망했다.

그녀를 처음 본 순간부터 에레크 명장은 몇 가지 질문에 사로잡혔다. 그 여인은 누구인가, 기품이 흘러 넘치는 데도 불구하고 백작의 성에서 시녀 일을 하는 연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왜 내 눈앞에서 그렇게 급하게 사라졌던 것인가? 지난 세월 동안 수 많은 귀족 여인들을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어찌하여 이 여인만이 마음을 사로잡은 것인가?

한 평생을 왕족과 함께하며 왕의 후손으로 대접받은 덕에 에레크 명장은 한눈에 다른 이의 기품을 알아봤다. 그렇기에 에레크 명장은 그 여인을 처음 본 순간부터 그녀가 지금 하는 일과는 달리 좀 더 지체 높은 신분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는 그녀가 누구인지, 어디에서 왔는지, 이 곳에서 무얼 하는 것인지 알고 싶은 마음에 안달이 날 정도였다. 그는 다시 한번 두 눈으로 그녀를 보고 싶었다. 자신이 그저 멋대로 상상한 것인지 아니면 자신의 생각이 맞는 건지 확인하고 싶었다.

“나의 시중이 말하길 그녀는 도시의 외각에 머물고 있다고 하네,” 에레크 명장과 함께 걷던 공작이 설명했다. 그들이 지나가는 동시에 길가에 위치한 모든 집집마다 창문이 열리며 안에 있던 사람들이 고개를 내밀었고 모두가 평민이 사는 동네에 공작과 그의 수행원들이 등장한 까닭을 궁금해 했다.

“듣자 하니, 여관 주인의 하녀로 있다더군. 그녀의 출신이 어디인지, 어디서 왔는지는 아무도 모른다네. 알아낸 것이라고는 그녀가 어느 날 이 도시로 왔고, 계약을 맺어 여관 주인의 하녀가 됐다는 것이네. 그녀의 과거는, 보아하니 불분명하네.”

일행은 또 다른 길로 들어섰다. 바닥에 깔린 자갈이 거칠었고 걸어 갈수록 보잘것없는 작은 집들이 더욱 밀집되어 붙어 있었다. 공작은 헛기침을 하며 목을 가다듬었다.

“나는 이번 특별한 행사를 맞이해 그녀를 내 궁전의 시녀로 들인 걸세. 그녀는 조용하고 자신의 얘기를 하지 않는다고 하네. 그 누구도 그녀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사람이 없네. 에레크 명장,” 공작이 에레크 명장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고 한 손으로 명장의 손목을 잡았다. “정말로 이 일에 확신이 있는가? 이 여인이, 누구이던 간에, 그녀는 그저 평민일 뿐일세. 자네는 왕국의 어느 여인이든 아내로 삼을 수 있지 않은가.”

에레크 명장은 이전과 같은 강렬한 표정으로 공작을 마주했다.

“저는 이 여인을 꼭 다시 봐야겠습니다. 그녀가 누구인지는 상관 없습니다.”

공작은 어쩔 수 없는 에레크 명장의 고집에 고개를 저었고 이내 다시 걸음을 옮겼다. 이들은 이리저리 놓여있는 길을 걷고 좁은 모퉁이를 돌고 돌았다. 길을 따라 걸어갈수록 사바리아의 거리는 더욱 지저분해졌고 술 취한 취객들이 곳곳에 가득했으며 이곳 저곳으로 오물과 함께 닭들과 들개들이 떠돌고 있었다. 공작 일행은 여관을 지나 또 다른 여관을 지나쳤다. 거리 위로는 길가는 행인의 비명소리도 들려왔다. 이들 앞으로 몇몇 술주정뱅이들이 비틀거리며 걸어 다녔고 어둠이 깊어져 횃불만이 길을 밝혀 주었다.

“공작님 행차이시니라!” 앞서 길을 안내하는 하인이 서둘러 술주정뱅이들을 밀치며 외쳤다. 거리 곳곳마다 불결해 보이는 길들이 이리저리 나뉘어져 있었고 에레크 명장과 함께 하는 공작의 일행을 본 사람들은 놀란 눈으로 그들의 행렬을 지켜봤다.

마침내 공작 일행은 작고 초라한 여관 앞에 도착했다. 외부는 벽토가 발려 있었고 경사진 슬레이트 지붕을 얹은 건물이었다. 일 층 주점은 대략 50여 명의 손님을 받을 수 있는 규모였고 이층에는 숙박객을 위한 객실 몇 개가 전부였다. 입구는 기울어져있었고 창문 하나는 유리창이 나가있었다. 입구에 달아놓은 램프가 삐뚤어져 횃불이 깜박거렸다. 공작 일행이 입구 근처로 다가서자 창문 밖으로 술 취한 취객들의 고성이 울려 퍼졌다.

그토록 기품이 넘치는 여인이 어찌 이런 곳에서 일을 한단 말인가? 안에서 울려 퍼지는 고성과 야유 소리에 개탄한 에레크 명장은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가 이곳에서 겪을 고초를 생각하니 마음이 아려왔다. 이건 옳지 않다, 라고 명장은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에레크 명장은 그녀를 이곳에서 반드시 빼내오리라 다짐했다.

“신붓감을 찾기에 가장 최악인 장소를 찾은 이유가 무엇인가?” 공작이 에레크 명장을 바라보며 이야기 했다.

브랜디트 또한 에레크 명장을 바라봤다.

“이게 마지막이네, 친구,” 브랜디트가 입을 열었다. “궁전에는 아직 자네가 돌아오길 기다리는 여인들로 가득하네.”

그러나 에레크 명장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렀다.

“문을 여시오,” 에레크 명장이 명령했다.

공작의 시중 하나가 앞으로 달려와 여관 문을 활짝 열었고 그와 동시에 오래된 술 냄새가 퍼져 나와 시중은 얼굴을 찌푸렸다.

내부에는 술 취한 취객들이 바에 엎드려 있었고, 목재 의자에 걸터앉은 사람들은 웃음을 터뜨리며 큰 소리로 서로 조롱을 퍼붓고 이리 저리 밀치고 있었다. 인생을 막사는 사람들이라는 걸 에레크 명장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산처럼 튀어나온 배와 얼굴에는 깍지 않은 무성한 수염, 세탁하지 않은 옷을 걸친 주정뱅이들이었다. 그 누구도 전사의 기량을 가진 자는 없었다.

에레크 명장은 그녀를 찾기 위해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녀와 같은 여인이 이런 곳에서 일을 할 수 있을 거라는 상상조차 하기 힘든 곳이었다. 혹시 잘못 찾아온 게 아닌가 의구심이 들었다.

“실례합니다, 선생님, 저는 한 여인을 찾고 있습니다,” 에레크 명장이 옆에 서 있던 키가 크고 체격이 건장한 사내에게 말을 걸었다. 그의 배는 산처럼 솟아 있었고 얼굴은 수염을 깎지 않아 덥수룩했다.

“아니 그럼 당신은?” 사내는 조롱하듯 소리를 크게 외쳤다. “그럼, 잘못 찾아왔소! 여긴 사창가가 아니야. 사창가는 저기 길 건너에 있지. 거기 여인들이 꽤나 실하고 포동포동 하다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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