Морган Райс - 전사로의 원정 стр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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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자도 포함됐소?”

“왕자님께서도 선발되셨고 모두에게 귀감이 되고 계십니다.”

왕은 고개를 끄덕인 뒤 브레데이에게 말을 건넸다.

“협곡 너머는 상황이 어떻소?”

“폐하, 순찰병에 따르면 최근 몇 주간 협곡 안으로 진입하려는 횟수가 늘어났다고 합니다. 아마 야만생물체가 침입을 시도하고 있다는 징조가 아닌듯싶습니다.”

자문단들 사이에서 나직한 속삭임이 퍼져나갔다. 맥길 왕의 복부가 긴장으로 조여 들었다. 에너지 장은 여전히 건재했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그러리라는 징후도 보이지 않았다.

“만약 총력을 다해 침입한다면 어찌되는가?”

“보호막이 활성화되어 있는 한 겁을 낼 필요가 없습니다. 야만생물체는 지금껏 수세기 동안 한번도 협곡을 뚫은 적이 없습니다. 침입걱정은 놓으셔도 됩니다.”

맥길 왕은 확신할 수 없었다. 외부의 침입은 이미 예정된 일이다. 그러나 그것이 정확이 언제 일어날지는 알 수 없었다.

펄스의 콧소리가 들렸다.

“제가 한 말씀 거들자면, 왕실은 이미 맥클라우드 왕국에서 보낸 고관들로 꽉 찼습니다. 적국의 고관들이긴 하나 만약 폐하께서 알현을 허락하지 않으시면 오히려 폐하를 웃음거리로 삼을 겁니다. 오늘 저녁은 그들을 알현하심이 어떠신지요? 그들은 수많은 수행자를 대동하고 찾아왔습니다. 진상 품을 가장한 염탐꾼들을 데리고요.”

“그 염탐꾼이 이 자리엔 없을 거라 그 누가 장담하오?”

펄스를 바라보는 왕의 마음속엔 혹시 그가 염탐꾼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품어져 있었다.

펄스는 왕의 질문에 답하기 위해 입을 열었지만 순간 맥길 왕은 한숨을 내 뱉고 팔을 저었다.

“오늘 정무가 이게 끝이라면 짐은 공주의 결혼식에 참석하러 가겠소.”

“폐하.”

캘빈이 목을 가다듬고 말했다.

“정무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첫째 공주님의 혼례 일에 대대로 전해지는 의식을 행하셔야 합니다. 모든 선왕께서는 이날 후계자를 임명하셨습니다. 백성들도 폐하께서 후계자를 임명하시길 기다리고 있습니다. 백성들이 궁금해합니다. 그들을 저버리지 마십시오. 더군다나 운명의 검이 여전히 동면에서 깨어나지 못하는 상황입니다.”

“짐이 이렇게 건재한데 후계자를 임명하라고 했소?”

“폐하, 그런 뜻이 아니옵니다.”

캘빈이 겁에 질려 잔뜩 떨었다.

왕은 고개를 들었다.

“짐도 전통을 잘 알고 있소. 그리고 실은 짐도 오늘 후계자를 선택하려 했소.”

“그렇다면 어느 분을 임명하시려고 하셨습니까?”

펄스가 궁금함을 드러냈다.

심기가 불편해진 왕은 그를 내려다 봤다. 펄스는 뒷말이 많은 인물이었다. 더군다나 왕은 펄스를 신뢰하지 않았다.

“때가 되면 알게 될 것이오.”

왕이 일어서자 일제히 모든 신하가 따라 일어섰다. 왕에게 예의를 차린 뒤 서둘러 뒤돌아 알현실을 빠져나갔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알지 못한 채 맥길 왕은 그 자리에 서있었다. 이런 날엔 자신도 왕이 아닌 평범한 백성 이길 바랬다.

*

왕좌에서 내려와 울리는 발소리를 들으며 알현실을 가로질렀다. 왕은 직접 고풍의 참나무 문을 열었다. 다시 강철 문고리를 잡아당겨 문을 열고 옆 방에 들어갔다.

맥길 왕은 이곳의 아늑한 공간이 선사하는 평화로움과 고독함을 늘 즐겼다. 아치형의 천장은 높게 뻗어 있었지만 방은 채 스무 걸음도 안될 만큼 작았다. 마감이 전부 돌로 되어있고 한쪽 벽면에 아주 작은 색유리 창문이 나있었다. 노랗고 붉은 창문 사이로 들어오는 빛이 아무 장식도 없는 방을 환하게 비춰주었다.

운명의 검.

운명의 검이 바로 이방에 있었다. 방 한가운데 철로 만든 갈래 위에 수직으로 마치 마음을 현혹하는 요부마냥 누워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늘 그래왔듯이 왕은 검으로 다가가 주위를 돌며 유심히 살폈다. 운명의 검. 힘의 근원지이자 맥길 왕가의 세대를 내려오며 왕국을 지탱해주는 힘의 원천, 전설의 검. 그 누구든 이 검을 들어올릴 수 있다면 그가 바로 선택된 자였다. 선택된 자만이 일평생 왕국을 다스리고 링 대륙 안팎의 모든 위협으로부터 왕국을 지킬 수 있었다. 태어나면서부터 들어온 아름다운 전설이었다. 오직 맥길 왕가의 왕이 되어야만 검을 뽑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고, 맥길 왕도 왕좌에 오르자마자 즉시 이 검을 뽑는 시도를 단행했다. 선대 왕들 모두 검을 뽑는데 실패했지만 자신은 다를 거라 믿었다. 왕은 자신이 선택된 자라고 확신했다.

그러나 착각이었다. 선대 왕들과 마찬가지로 맥길 왕도 실패했고 이로 인해 그 어느 때보다 왕업에 큰 타격을 느꼈다.

운명의 검을 주시했다. 그 누구도 무엇이라 정의 내릴 수 없는 신비한 금속으로 이뤄진 긴 칼날을 살폈다. 검의 기원은 더욱 모호했다. 지진 한가운데서 솟아올랐다는 설도 전해졌다.

검을 보고 있자니 다시 한번 실패의 아픔이 느껴졌다. 맥길 왕은 어진 왕이긴 하나 선택된 자는 아니었다. 백성들을 비롯한 그의 적들까지 알고 있었다. 그가 좋은 왕이긴 하나 무슨 수를 써도 절대 선택된 자가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만약 그가 선택된 자라면, 아마 왕실 내에 구금과 음모는 덜 했을 거라 확신했다. 백성들은 그를 더욱 절대적으로 지지했을 테고 적들도 감히 꿈에라도 침략은 엄두도 못 냈을 것이다. 맥길 왕의 마음 한 켠에선 운명의 검이 전설과 함께 아예 사라져버리길 바랬다. 그러나 그런 일이 있을 리는 만무했다. 바로 그 것이 운명의 검에 얽힌 저주였고 또 힘의 근원이었다. 그 어떤 군대보다 강력한 힘이었다.

그 동안 셀 수 없이 여러 번 검을 살펴봤고 그럴수록 선택 받은 자가 과연 누구일지 궁금했다. 맥길 왕가의 후계 중 과연 누군가가 검을 뽑아들 운명을 얻게 될까? 왕은 눈 앞에 놓인 과업을 생각했다. 후계를 정해야 했지만 자식들 중에 혹 선택된 자가 있다 해도 정령 그게 어느 자식일지 알 수 없었다.

“칼 날의 무게가 상상 그 이상이죠.”

작은 방에 누군가가 있었다는 생각에 놀란 왕이 돌아봤다.

문가에 서있는 건 아르곤이었다. 왕은 이미 목소리를 듣고 그가 누군지 짐작했고, 그의 불참이 다시 한번 상기되며 짜증이 났지만 한편으론 그의 등장이 반가웠다.

“늦었군.”

“폐하의 시간으론 그렇죠.”

“짐이 이 검을 들 수 있을 거라 생각해보긴 했는가? 짐이 왕위 계승을 하던 날 말이오.”

“아니요.”

아르곤의 목소리가 단호했다.

맥길이 뒤를 돌아 그를 바라봤다.

“짐이 선택 받은 자가 아니라는걸 자네는 알고 있었지. 처음부터 알고 있지 않았소?”

“그렇습니다.”

왕은 곰곰이 생각했다.

“자네의 직언이 상처가 되는군. 자네답지 않네.”

아르곤은 침묵으로 일관했고 왕은 더 이상 아르곤이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거라는 걸 깨달았다.

“짐은 오늘 후계를 발표하오. 이런 날 후계를 정하다니 공허할 뿐이요. 자식을 결혼시키는 즐거운 날, 왕의 기쁨을 앗아가 버리는 것과 같소.”

“어떤 기쁨은 그렇게 완급 되기도 하지요.”

“허나 짐은 아직 정정하오.”

“폐하께서 생각하시는 것만큼 시간이 많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왕은 실눈을 뜨며 생각에 잠겼다. 짐에게 전하는 메시지인가?

그러나 아르곤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자식 여섯 중 누굴 골라야 하겠소?”

“왜 제게 여쭈십니까? 이미 정해 두신걸 알고 있습니다.”

왕은 그와 시선을 맞췄다.

“많은걸 알고 있군. 이미 정했소. 그러나 자네 생각이 궁금하군.”

“현명한 결정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명심하세요. 땅 속에 묻힌 왕은 더 이상 통치할 수 없죠. 폐하께서 누구를 선택하시든 운명은 아랑곳 않고 제 길을 찾아 가지요.”

“내가 계속 살 수 있겠소, 아르곤?”

맥길 왕이 솔직하게 물었다. 끔직한 악몽을 꾸고 난 뒤부터 쭉 아르곤에게 던지고 싶었던 질문이었다.

“어젯밤 꿈에서 까마귀를 봤소. 짐에게 날아와 왕관을 뺏어갔소. 곧 다른 까마귀가 날 물고 갔지. 발 밑으로 왕국이 보였고 황무지의 땅, 바렌으로 향하는 짐의 몸이 검게 변했소.”

왕은 촉촉해진 두 눈으로 아르곤을 바라봤다.

“단순한 꿈이오? 아니면 무언가가 더 있소?”

“꿈은 늘 꿈 이상의 것을 말해주지 않던가요, 그렇지 않나요?”

왕은 불안감에 휩싸였다.

“위협은 어디에 도사리고 있는가? 그것만이라도 말해주게.”

아르곤은 가까이 다가가 강렬하게 왕의 눈을 주시했다. 왕의 눈엔 그가 마치 다른 세계를 보고 있는 듯 보였다.

아르곤은 몸을 숙여 속삭였다.

“언제나 생각한 것 보다 가까이에 있지요.”


제 4장

토르는 거칠게 시골길을 달리는 마차 뒤편 짚 더미에 숨어 있었다. 어젯밤이 다 되어서야 당도한 길에 줄곧 머무르며 숨어서 타고 갈만한 넉넉한 크기의 마차가 지나가길 침착하게 기다렸다. 어둑해질 무렵에서야 천천히 달려오는 커다란 마차가 하나 보였고 토르는 그제서야 힘껏 뛰어 마차에 올랐다. 뛰어오른 마차의 짐칸엔 건초더미가 가득했고 토르는 그 속으로 몸을 묻었다. 운 좋게도 마부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토르가 오른 마차가 왕실로 가고 있다는 확신은 없었지만 이 정도 규모와 마차의 문양을 감안하면 왕실 외에 다른 곳으로 갈 확률은 희박했다.

밤새 마차를 타고 가는 내내 뜬 눈으로 지새우며 오늘 대면한 일을 회상했다. 시볼드, 아르곤, 주어진 운명, 진짜 집, 어머니. 마치 우주로부터 답을 얻은 것 같았다. 자신에게 또 다른 소명이 주어졌다는 메시지를 받은 기분이었다. 머리 위로 두 손을 깍지 끼고 누워, 해진 천막 틈으로 하늘을 올려다 봤다. 밤 하늘 위를 붉은 별들이 밝게 수놓고 있었다. 기분이 한껏 들떴다. 생애 처음으로 오른 여정이었다. 어디로 향하는지 정확히 알 순 없지만 이미 몸은 마차에 실려 있었다. 어떻게든 목적지는 왕실이었다.

눈을 떴을 땐 이미 아침이 밝아 있었다. 빛이 환하게 쏟아졌고, 깨고 나서야 깜빡 잠이 든걸 알았다. 황급히 몸을 일으켜 주위를 둘러봤고 졸음을 못이긴 자신을 꾸짖었다. 좀 더 경계를 늦추지 말았어야 했다. 들키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었다.

달리는 마차의 덜컹거림이 줄어들었다. 어느덧 평평해진 길 덕분이었다. 토르는 고개를 숙여 길이 얼마나 잘 다듬어졌는지 직접 확인했다. 돌멩이나 도랑 하나가 없었다. 반질반질한 조개 껍데기로 이어 만든 길이었다. 길을 보아하니 마차의 목적지가 왕궁인 게 틀림없었다. 심장이 다시 두근거렸다.

마차 밖으로 살펴본 광경은 가히 압도적이었다. 티 하나 없이 깨끗한 거리는 활기가 넘쳤다. 세상의 모든 물건들을 실은 듯한 온갖 종류의 수레들이 거리를 빼곡히 메웠다. 한 수레에는 모피가 다른 수레에는 양탄자가 또 다른 수레에는 닭이 한 가득 실려 있었다. 그 사이로 보이는 수백 명의 상인들 중 일부는 왕실로 향했고 그 중 일부는 양 손 가득 물건이 가득 쌓인 바구니를 들고 있었다. 길다란 막대기에 잔뜩 매단 비단 꾸러미를 사내 넷이서 나란히 이고 옮겼다. 엄청난 인파였고 모두 같은 방향을 따라 걸어갔다.

생기가 느껴졌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과 많은 물건들과 다양한 광경은 난생 처음이었다. 사는 동안 자그마한 시골마을을 벗어나 본적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 토르가 있는 곳은 다름아닌 어마어마한 인파의 중심부였다.

시끄러운 소음이 들렸다. 쇠사슬이 요란하게 달그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엄청난 크기의 목조교량이 밑으로 내려오며 땅이 진동했다. 잠시 후 마차를 이끄는 말들이 나무 위를 지나가며 딸각거리는 말발굽 소리를 냈다. 밑을 내려다 보니 말들이 지나는 건 목조교량이었다. 말로만 듣던 도개교였다.

고개를 밖으로 쭉 빼고 거대한 돌기둥과 쇠못이 박힌 철문을 올려다봤다. 마차는 왕실의 성문을 통과하는 중이었다.

지금껏 보아온 모든 문을 통틀어 크기가 가장 컸다. 토르는 철문에 난 못을 살폈다. 철문이 내려오면 토르를 반으로 가르고도 남을 정도였다. 경이로웠다. 성문 입구에서 엄호중인 네 명의 실버 대원이 보이자 심장이 더욱 두근거렸다.

마차는 다시 길고 긴 석조터널을 지났고 터널이 끝나고 나서야 머리 위로 푸른 하늘이 보였다. 왕궁 내부였다.

믿기 힘든 광경이었다. 왕궁 안은 더욱 활기가 넘쳤다. 수천 명의 사람들이 보이는 곳마다 무리를 지어 서성거렸다. 어마어마한 규모의 잔디밭이 완벽하게 손질되어 있었고, 주변은 온통 만발한 꽃들로 화려함이 극에 달했다. 그 어느 곳보다 드넓은 길이 펼쳐져 있었고 그 길을 따라 상점과 노점 및 석조 건물들이 줄지어 들어서 있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눈에 들어오건 멋지게 갑옷을 차려 입은 실버였다. 꿈꿔왔던 왕궁에 도착한 순간이었다.

토르는 흥분에 못 이겨 자신도 모르게 벌떡 일어났다. 순간 마차가 멈췄고 그 바람에 토르는 중심을 잃고 뒤로 몸이 젖혀져 덤불 위로 넘어졌다. 몸을 채 추스르기도 전에 나무걸쇠가 덜컹거리는 소리가 들렸고 눈앞에 화가 잔뜩 난 넝마 차림의 늙은 사내가 나타났다. 마부는 짐칸으로 들어와 앙상한 손으로 토르의 발목을 잡아 밖으로 끌어냈다.

거의 날다시피 바닥에 내팽개쳐진 토르의 꼬꾸라진 등 뒤로 흙먼지가 일어났다. 주변에서 웃음소리가 들렸다.

“다음에 또 내 마차에 타면 쇠고랑을 차게 될 줄 알아! 내가 지금 실버를 호출하지 않는걸 천만다행으로 여기라고!”

마부는 뒤로 돌아 침을 뱉고는 서둘러 마차에 올라타 말을 채찍질했다.

창피해진 토르는 천천히 신발을 주워 신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행인 한 두 명이 걸음을 멈추고 킥킥대고 있었다. 그들이 시선을 돌릴 때까지 토르도 똑같이 그들을 비웃었다. 몸에 묻은 먼지를 털고 팔을 문질렀다. 자존심은 상했지만 다친 곳은 없었다.

주변을 둘러보고 나니 다시 기분이 밝아졌다. 현란한 광경에 눈이 부셨고 마침내 왕궁에 도착했다는 사실에 행복했다. 게다가 마차 안에서보다 훨씬 자유롭게 왕궁을 구경할 수 있었다. 끝도 없이 시선을 타고 펼쳐지는 왕궁의 모습은 가히 경이로웠다. 중심부에는 으리으리한 석조 궁전이 자리 잡고 있었고 그 주변은 요새처럼 우뚝 솟은 석조성벽이 에워싸고 있었다. 성벽 위 곳곳에서는 근위대가 근무를 서고 있었다. 정성스레 손질된 푸른 들판들이 이곳 저곳 드리워져 있었고 나무 숲과 다수의 석조 광장 및 분수들이 그곳을 조화롭게 꾸미고 있었다. 이곳이 바로 도시였다. 그리고 이 도시란 곳엔 인파가 넘쳐났다.

온 사방이 상인들, 병사들, 고위 인사들 등 다양한 출신들로 북적거렸고 모두 무언가에 쫓기듯 바쁘게 움직였다. 얼마간 시간이 흐른 뒤에야 뭔가 특별한 행사가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슬렁어슬렁 걸어가며 행사가 마련되는 과정을 지켜보았다. 의자가 놓이고 제단이 세워졌다. 결혼식 준비 같았다.

저 멀리 마상 경기장 안으로 도로와 경계선이 보이자 토르의 심장이 다시 두근거렸다. 다른 구장에서는 병사들이 먼 거리의 목표물을 향해 창을 던지고 있었고, 또 다른 구장에서는 궁수들이 짚으로 만든 목표물을 조준하고 있었다. 사방이 경기와 시합으로 가득했다. 음악소리도 들려왔다. 연주자들이 가득했고, 류트, 플루트, 심벌즈의 선율이 울렸다. 와인과 초대형 케이크, 식사가 옮겨졌고 탁자가 세워졌다. 눈에 들어오는 모든 곳에서 연회준비가 한창이었다. 장대한 축제의 한복판에 이제 막 들어선 느낌이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에 황홀함을 느낄수록 왕의 부대를 찾아야 한다는 마음이 토르를 보챘다. 이미 늦긴 했지만, 어떻게 해서든 자신의 진가를 알리고 싶었다.

토르는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늙은 사내에게 다가갔다. 핏물이 베인 옷차림을 보아하니 정육점 주인 같았는데 어디론가 바쁘게 걸어가고 있었다. 이곳의 사람들은 모두 하나같이 시간에 쫓기는 모양새였다.

“실례합니다.”

토르가 남자의 팔을 붙잡아 세웠다.

“무슨 일이지, 얘야?”

“왕의 부대를 찾고 있어요. 혹시 그 훈련장이 어딘지 아세요?”

“내가 지도로 보이냐?”

남자는 토르에게 면박만 주고 급하게 가던 길을 재촉했다.

무례함에 어안이 벙벙해졌다.

서둘러 다른 사람에게 갔다. 긴 탁자 위에서 밀가루를 반죽하고 있는 소녀였다. 탁자 위로 소녀 여러 명이 열심히 일을 하고 있었다. 이들 중 적어도 한 명은 길을 알 것 같았다.

“실례합니다. 아가씨, 왕의 부대 훈련소가 어딘지 알 수 있을까요?”

이들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고 킥킥거렸다. 그 중 몇 명은 토르보다 서너 살 나이가 많아 보였다.

가장 나이 많은 소녀가 토르를 쳐다봤다.

“장소를 잘못 찾아왔어. 우린 지금 축제 준비 중이야.”

“그렇지만 왕의 부대는 왕궁 안에서 훈련 받는다고 하던데요?”

토르는 혼란스러웠다.

이들은 다시 한번 싱긋 웃어댔다. 소녀는 허리 위에 손을 얹고 고개를 저었다.

“생전 처음 왕궁에 와본 사람 같이 굴고 있잖아. 여기가 얼마나 큰지 모른단 말이니?”

토르의 얼굴이 빨개졌다. 이들은 하나 둘씩 웃어대다 결국 다 함께 박장대소했다. 놀림 당한 마음에 기분이 언짢았다.

눈 앞엔 열두 갈래의 도로가 펼쳐져 있었다. 굽이굽이 난 길은 모두 왕궁을 가로질렀다. 돌로 된 담벼락 사이마다 적어도 12개 이상의 출입문이 들어서 있었다. 왕궁의 크기와 규모는 가히 압도적이었다. 몇 날 며칠을 찾아도 훈련장을 못 찾을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순간 묘안이 떠올랐다. 병사들이라면 누구나 훈련장 위치를 알고 있었다. 병사에게 말을 거는 건 긴장됐지만 그 방법밖에 없었다.

뒤돌아 성벽으로 달렸다. 출입구 가장 가까이 근무중인 근위병을 찾아갔다. 행여 메치기라도 당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마음을 애써 숨겼다. 눈 앞의 근위병은 고개를 꼿꼿이 세우고 정면을 주시하고 있었다.

“왕의 부대를 찾고 있습니다.”

토르는 최대한 자신감 있어 보이도록 신경 써서 말을 건넸다.

잠깐의 정적 뒤에 근위병이 냉소를 지으며 시선을 내렸다.

“어디 있는지 말해주시겠어요?”

“무슨 볼일이 있는 거지?”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토르는 애원하듯 대답했고 더 이상 근위병이 캐묻지 않길 바랬다.

근위병은 토르를 무시하고 다시 정면을 주시했다. 대답을 포기해야 할 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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