Морган Райс - 전사로의 원정 стр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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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한참 뒤, 근위병이 입을 열었다.

“동문으로 나가서 북쪽으로 쭉 가. 왼쪽에 있는 세 번째 문으로 가서 오른쪽으로 빠져. 그리고 다시 오른쪽으로 빠져. 두 번째 석조 원형 구조물을 지나면 그곳으로 가는 문이 있어. 그러나 가봐야 시간 낭비야. 방문객은 받지 않아.”

대답은 충분했다. 일초도 낭비하기 싫어 재빨리 뒤돌아 들은 대로 뛰었다.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 머릿속으로 길을 반복해 읊었다. 해는 이미 중천이었고 너무 늦기 않게 훈련장에 당도하기만을 마음속으로 기원했다.

*

깨끗한 조개 도로 위로 왕궁을 이리저리 가로지르며 사력을 다해 달렸다. 길을 잃고 헤맬까 두려워 가능한 한 일러준 대로 따라갔다. 저 멀리 안뜰 끝에 여러 개의 문이 보였고 그 중 왼쪽 세 번째 문을 통과한 뒤 이어지는 행렬을 따라 한 길 한 길 건너갔다. 토르가 뛰는 방향은 사람들과 정 반대였다. 수천 명이 도시로 몰려든 덕분에 시간이 지날수록 인파가 거세졌다. 류트 연주자, 곡예 꾼, 광대 등 온갖 재능을 갖춘 예능인들을 비롯해 한껏 차려 입고 나온 사람들과 어깨를 부딪히며 사람들 사이를 헤쳐 나갔다.

토르가 빠진 채로 진행되는 부대원 심사는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 훈련장만 생각하며 훈련장처럼 생긴 건물만을 찾아 거리를 뒤졌다. 원형의 석조건물 끝에 또 다른 길이 이어져 있었다. 그 길을 따라가다 보니 저 멀리서 훈련장으로 보이는 완벽한 원형의 석조 콜로세움이 조그맣게 보였다. 큼지막한 정문 한가운데는 보초병으로 보이는 병사들이 있었다. 정문 밖으로 울려 퍼진 환호성이 희미하게 귓가를 스쳤고 덕분에 심장이 두근거렸다. 왕의 부대 훈련장이 틀림없었다.

전속력으로 달리자 숨이 턱 끝까지 차 올랐다. 정문 앞으로 다가간 순간 보초병 두 명이 나와 창살을 겨누며 길을 막았다. 그리고 또 다른 보초병이 앞으로 걸어나오며 손바닥으로 토르를 막아 섰다.

“멈춰라.”

토르는 숨을 헐떡거리며 멈췄다. 얼굴엔 흥분된 표정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이해…… 못 하시……겠지만”

토르는 숨을 고르느라 더듬거렸다.

“저는 꼭 저 안에 들어가야 합니다. 늦었습니다.”

“어디에 늦었다는 건가?”

“부대원 심사요.”

짤막한 키에 얼굴엔 곰보자국이 가득한 뚱보 보초병이 뒤로 돌아 냉소적인 눈빛의 나머지 보초병들과 시선을 교환했다. 그러더니 이내 몸을 돌려 깔보는 눈빛으로 토르를 살폈다.

“이미 몇 시간 전에 왕실 수송실에서 심사가 시작됐다. 선발되지 않은 자는 입장할 수 없다.”

“이해하기 힘드시겠지만 전 꼭.”

보초병이 다가서서 토르의 상의를 움켜쥐었다.

“이해를 못하는군, 건방진 꼬맹이.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너 따위가 들어가겠다는 거냐? 당장 구금되기 싫으면 돌아가.”

보초병에 밀쳐진 토르는 뒷걸음질 쳤다.

밀쳐진 가슴팍이 따끔했다. 그러나 이보다 출입을 거부당했다는 사실에 가슴이 쓰라렸다. 화가 치밀었다. 고작 보초병에게 밀려 심사도 제대로 못 받고 돌아가려고 이곳까지 온 게 아니었다. 무슨 수를 써서든 안으로 들어가야 했다.

뚱보 보초병이 동료들에게 돌아가자 토르는 천천히 그곳을 빠져 나와 시계방향으로 콜로세움을 돌았다. 품은 계획이 있었다. 보초병의 시야를 피해 최대한 멀리 떨어져서 힘껏 뛰어올라 벽을 타고 건물을 넘어갈 생각이었다. 토르는 보초병을 마지막으로 확인한 뒤 전속력을 다해 벽을 뛰어 넘었다. 건물의 절반쯤 진입했을 때 경기장으로 안내하는 또 다른 출입문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곳의 석조 출입문들은 모두 아치형으로 하늘 높이 솟아 있었고 쇠로 된 빗장이 단단히 걸려 있었지만 단 한곳만은 예외였다. 또 다시 들려오는 함성소리에 토르는 선반 위로 몸을 일으켜 내다봤다.

심장박동이 빨라졌다. 어마어마한 원형 경기장 안을 수십 명의 선발대원이 메우고 있었다. 토르의 형들도 보였다. 줄을 맞춰 정렬한 이들 앞엔 실버대원 열 두 명이 서 있었다. 대원들은 이들 사이로 걸어가 선발된 인원을 확인했다.

선발대원 무리 하나는 옆으로 빠져 있었다. 그들은 실버 대원들의 주시 하에 창을 던져 멀리 떨어진 목표물을 맞추고 있었다. 그 중 한 명이 목표물을 놓쳤다.

그 모습에 울화가 터졌다. 토르라면 충분히 목표물을 맞추고도 남았다. 토르는 저들과 비교해 모자랄 게 없었다. 단지 조금 어리고 몸집이 그들보다 아주 조금 작다는 이유만으로 선발되지 못한 건 불공평했다.

난데없이 등뒤로 손길을 느껴졌다. 순간 그대로 낚인 토르는 뒤로 날아가 바닥에 매몰차게 내동댕이 쳐져 숨이 멎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올려다보니 아까 그 보초병이 비꼬는 얼굴로 토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내가 뭐라고 했지, 꼬맹이?”

토르가 채 일어나지도 못했는데 보초병은 몸을 쭉 빼 토르에게 거센 발길질을 가했다. 보초병의 발에 맞은 순간 토르는 갈비뼈에 예리한 타격을 느꼈다.

다시 한번 보초병이 발을 들어올렸을 때 토르는 공중에 뜬 보초병의 발을 잡았다. 덕분에 보초병은 중심을 잃고 보기 좋게 넘어졌다.

그사이 재빨리 토르가 몸을 일으켰고, 넘어진 보초병도 몸을 일으켜 세웠다. 토르는 자신이 한 짓에 너무 놀란 나머지 보초병의 눈치를 살폈다. 보초병은 눈을 번뜩이며 토르를 마주보고 있었다.

“네가 널 구금만 시키고 끝낼 줄 아나 본데.”

보초병이 씩씩거렸다.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해줄게. 감히 폐하의 병사에게 손을 대다니. 왕의 부대에 가입하려는 꿈은 이제 접어라. 지하 감옥에서 썩을 각오나 해둬. 운이 좋아야 다시 세상 구경 하겠지!”

보초병은 족쇄가 달린 쇠사슬을 꺼내 앙갚음을 하겠다는 표정으로 토르에게 다가갔다.

초조함이 극에 달한 순간이었다. 구금이라니, 말도 안됐다. 그렇다고 구금을 면하자고 폐하의 병사를 다치게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뭔가 살길을 찾아야 했다. 지금 당장.

새총이 생각났다. 반사적으로 새총에 돌을 끼워 조준했고 돌멩이가 날아갔다.

허공을 가르고 날아간 돌멩이는 족쇄에 명중한 뒤 깜짝 놀란 보초병의 손가락을 맞췄다. 족쇄가 땅으로 떨어지자마자 보초병은 손을 뒤로 빼 앞뒤로 흔들며 고통스럽게 울부짖었다.

보초병은 살기를 가득 띤 얼굴로 검을 뺐다. 독특한 금속 고리가 가득 박힌 검이었다.

“방금 전 돌멩이는 네 생애 마지막 실수가 될 거다.”

보초병은 무섭게 위협하며 토르에게 돌진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더 이상 곱게 보내주지 않을 것이 뻔했다. 돌멩이 하나를 다시 새총에 끼우고 던졌다. 신중하게 조준했다. 보초병을 자제시켜야 했지만 죽이고 싶진 않았기에 심장, 코, 눈, 머리가 아닌 그를 멈출 수 있게 해줄 단 한 곳을 겨냥했다.

사타구니.

힘의 세기를 조절해 보초병이 쓰러질 정도의 힘만 가했다.

명중이었다.

보초병은 검을 떨어드리고 무릎을 꿇었다. 사타구니를 붙잡고 쓰러져 몸을 동그랗게 말고 데굴데굴 굴렀다.

“넌 참수 형이야.”

고통스런 신음소리가 이어졌다.

“경비! 경비!”

저 멀리서 달려오는 여러 명의 보초병이 보였다.

지금이 아니면 기회는 없었다.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창문 난간을 향해 전속력으로 달렸다. 난간으로 몸을 날려 경기장 안으로 뛰어들어가 주목을 끌어야 했다. 그리고 토르를 막는 모든 사람들과 겨뤄야 했다.

제 5장

맥길 왕은 궁전의 상부에 위치한 아늑한 집회장에 앉아 있었다. 사적인 용무를 처리할 때 주로 이용하는 곳이었다. 왕은 나무조각이 새겨진 목조 왕좌에 앉아 눈 앞에 서있는 네 명의 자식을 마주했다. 첫째 왕자 캔드릭. 스물 다섯의 나이에 훌륭한 실버 전사이자 진정한 신사. 형제들 중 맥길 왕을 가장 많이 닮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맥길 왕이 오래 전 마음속에서 지운 옛 연인과의 사이에서 둔 자식이었다. 왕은 캔드릭을 나머지 자식들과 함께 키웠다. 처음에는 왕비가 반대하고 나섰지만 캔드릭을 후계에서 배제시키는 조건으로 이내 받아들여졌다. 이 때문에 왕은 늘 마음 한구석이 아팠다. 맥길 왕이 아는 한 캔드릭이야 말로 왕위에 가장 적합했고 의심의 여지없이 왕위를 넘겨주고픈 자식이었다. 왕국의 후계자로 캔드릭보다 나은 적임자는 없었다.

캔드릭 옆에는 그와 완벽한 대비를 이루는 둘째 왕자가 서 있었다. 둘째라고는 하지만 그야말로 왕과 왕비의 혈통을 물려받은 적자들 중에서도 장자였다. 스물 셋. 왜소하고 마른 뺨과 한곳에 시선을 오래 두지 못하는 갈색 눈을 가진 개리스 왕자. 성격 또한 첫째 왕자와 정 반대였다. 캔드릭 왕자가 지니지 않은 천성은 모두 개리스 왕자의 몫이었다. 캔드릭 왕자는 솔직했지만 개리스 왕자는 늘 생각을 숨겼다. 캔드릭 왕자는 훌륭하고 고귀한 품성을 지녔지만 개리스 왕자는 불성실하고 교만했다. 맥길 왕은 자신의 핏줄을 미워한다는 사실이 고통스러웠다. 개리스 왕자의 천성을 고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지만 그의 소년기를 지켜보며 이마저도 포기했다. 왕은 개리스 왕자의 천성이 그의 운명이라고 판단 내렸다. 안 좋은 의미에서 개리스 왕자는 계략적이었고 권력에 굶주려 하는 만큼 야심이 넘쳤다. 더욱이 개리스 왕자는 여성에게는 애정을 품지 못하고 여럿의 동성 애인을 사귀었다. 맥길 왕도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고 이 일로 왕자를 비난하진 않았다. 오히려 왕이 비난한 건 절대로 간과할 수 없는 그의 사악함과 교활한 천성이었다.

개리스 왕자 옆에는 왕의 둘째 여식 그웬돌린 공주가 서 있었다. 이제 막 열여섯이 된 공주는 맥길 왕이 지금껏 본 그 어느 소녀보다 아름다웠고 더욱이 외모보다도 빼어난 천성을 지녔다. 공주는 상냥하고 자비로우며 정직했고 맥길 왕이 아는 한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숙녀였다. 이련 면에서 공주는 캔드릭 왕자와 닮아 있었다. 공주의 눈빛에는 사랑하는 아버지를 바라보는 딸의 애정이 충만했고 시선에서는 왕에 대한 충성심이 가득 느껴졌다. 맥길 왕은 그 어느 왕자 보다 그웬돌린 공주가 자랑스러웠다.

공주의 옆은 맥길 왕의 막내 리스 왕자가 지키고 있었다. 얼마 전 열네 살 성인이 됐고, 긍지와 기백이 넘치는 인물이었다. 리스 왕자가 왕의 부대에 선출되기까지의 과정을 맥길 왕은 흐뭇하게 지켜봤다. 맥길 왕은 리스 왕자의 앞날을 이미 짐작할 수 있었다. 자식들 중 가장 빼어난 아들로서 훗날의 훌륭한 지도자감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너무 일렀다. 아직 왕이 되기엔 한참 어리고 배워야 할게 많았다.

눈 앞에 서있는 왕자 셋과 공주 한 명을 찬찬히 뜯어보고 있자니 왕의 마음엔 만감이 교차했다. 자부심과 실망감이 교차했다. 자식 두 명이 이 자리에 불참한 사실에 한편으론 화가 나고 신경 쓰였다. 가장 연장자인 첫째 루안나 공주는 물론 결혼식 준비에 열중해야 했고 서부 왕국으로 시집을 가기 때문에 오늘의 후계자 선임 자리에 참석할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열여 덜, 고드프리 왕자는 불참했다. 왕은 이에 대한 모욕감으로 얼굴을 붉히고 있었다.

고드프리 왕자는 어릴 적부터 왕권을 존중하지 않았다. 확실한 건 왕자가 후계에도 관심이 없고 왕위 후보감도 되지 못한다는 사실이었다. 왕이 제일 실망한 건 바로 고드프리 왕자가 이 모든걸 뒤로하고 술집에서 비열한 친구들과 어울려 술로 인생을 허비하고 이로써 왕족에게 전에 없던 수치심과 불명예를 안겨주는 왕자의 행실이었다. 왕자는 대부분의 시간을 잠이나 술로 보내는 태만한 생활을 즐겼다. 고드프리 왕자의 불참에 왕은 한편으론 안도했지만 다른 한편으론 참을 수 없는 모욕감을 느꼈다. 허나 실상은 왕도 이미 짐작했던 일이었기에 아침 일찍 술집으로 사람들을 보내 왕자를 데려오라 미리 명해뒀다. 맥길 왕은 지금까지 침묵으로 일관하며 그들의 당도만을 기다렸다.

순간 왕자들과 공주가 일제히 뒤를 돌아봤다. 흐트러진 모습의 고드프리 왕자가 고약한 술 냄새를 풍기며 덥수룩한 얼굴에 옷을 반쯤 입은 형상으로 서 있었다. 고드프리 왕자는 형제들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건방진 모습이었다. 늘 예외 없이.

“아버지, 안녕하세요. 제가 볼거리를 놓쳤나요?”

“형제들 옆으로 가서 조용히 있거라. 그렇지 않으면 하는 수 없이 일반 수용자들과 마찬가지로 널 수용소에 가두는 수밖에 없구나. 삼일 간 식사도 없고 술도 아주 조금만 허락하겠다.”

교만함을 드러내며 고드프리 왕자가 왕을 노려봤다. 왕은 그의 눈빛 속 어딘가에 깊이 내제하고 있는 힘을 감지했다. 고드프리 왕자의 천성을 대변하는 힘. 언젠가 고드프리 왕자를 바르게 이끌어줄 뭐라 설명하기 힘든 광채였다. 만약 왕자가 자신의 인품을 다스릴 수만 있게 된다면 말이다.

반항은 짧게 끝났다. 10초 정도 왕을 주시했던 왕자는 결국 수긍한 채 느릿느릿한 걸음걸이로 형제들에게 향했다.

맥길 왕은 눈 앞의 다섯 자식을 살펴봤다. 사생아, 동성애자, 술주정뱅이, 딸, 막내아들. 오묘한 조합이었다. 이들 모두 자신의 혈육이란 게 믿기 힘들 정도였다. 그리고 맥길 왕은 오늘, 첫째 공주의 결혼식 날, 여기 서있는 자식들 중에서 후계를 골라야 하는 과업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이런 부조리가 어디 있단 말인가?

전부 쓸모 없는 짓이었다. 맥길 왕은 현재 전성기에 있었고 앞으로도 30년은 족히 왕권을 장악하고도 남았다. 누구를 후계자로 선택하든 적어도 향후 몇 십 년 뒤에서야 왕위를 계승하게 된다. 후계를 정하는 전통에 맥길 왕은 진절머리가 났다. 선대 왕들에겐 그 시기가 적절하게 맞아떨어졌을지 몰라도 지금은 후계를 임명할만한 시기가 아니었다.

왕은 목을 가다듬었다.

“우리는 모두 대대로 내려오는 전통을 계승하기 위해 이 자리에 모였다. 알다시피 오늘은 내게 후계 선택의 과업이 주어진 첫째 공주의 혼례 날이다. 후계자는 이 왕국을 다스리게 된다. 내가 죽는다면 가장 왕국을 잘 다스릴 적임자는 바로 너희들의 어머니다. 그러나 왕국의 법은 오직 왕의 자식만이 왕권을 계승하도록 명하고 있다. 따라서 나는 선택해야만 한다.”

왕은 잠시 숨을 멈추고 생각에 잠겼다. 무거운 침묵이 공간을 메웠고 자식들 각자의 기대감이 전해졌다. 자식들의 눈빛에서 각각 상이한 속마음이 드러났다. 사생아의 눈빛은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은 걸 수긍하듯 침착했다. 반면 동성애자의 눈빛은 마치 당연히 자신이 지목되리라는 기대감과 함께 야망으로 이글거렸다. 술주정뱅이는 자신과는 무관한 일이라는 듯 창 밖만 바라볼 뿐이었다. 공주는 애정 어린 눈으로 왕을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이 후계 논의 대상이 아니라는걸 잘 알고 있었고 이런 상황과 상관없이 아버지에 대한 애정을 여지없이 드러냈다. 막내 왕자도 공주와 마찬가지였다.

“캔드릭, 난 널 언제나 다른 자식들과 똑같이 여겼다. 그러나 왕국의 법에 따라 적자가 아닌 자식에겐 왕위를 물려줄 수 없구나.”

캔드릭이 허리를 숙였다.

“폐하, 그렇게 하시길 바라옵니다. 전 지금의 상황에 만족합니다. 이 일로 폐하께 근심을 드리고 싶지 않습니다.”

맥길 왕의 마음이 아파왔다. 왕자의 말에 담긴 진심이 느껴졌고 이에 더더욱 캔드릭 왕자를 후계자로 임명하고 싶었다.

“이제 네 명이 남았구나. 리스, 넌 이제껏 내가 본 중에 가장 훌륭한 청년이야. 그러나 후계 논의의 대상이 되기엔 아직 너무 어리구나.”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리스왕자가 허리를 굽혀 예의를 갖췄다.

“고드프리, 넌 세 명의 적자 중 하나다. 그러나 넌 술집에서 타락을 일삼으며 인생을 낭비하는 삶을 택했지. 넌 가질 수 있는 모든 특권을 다 가지고 태어났지만 그 모든걸 내쳤어. 내 인생에 있어 가장 큰 실의가 있다면 그건 바로 네가 되겠지.”

고드프리 왕자는 얼굴을 찌푸리며 불편한 듯 몸을 이리저리 움직였다.

“그럼 제 볼일은 더 이상 없는 거죠. 다시 술집이나 가야겠어요, 그래도 되겠죠, 아버지?”

성급히 모욕적인 인사를 건넨 고드프리 왕자가 몸을 돌려 집회실 한가운데를 가로질렀다.

“돌아오거라!”

왕이 호통쳤다.

“당장!”

고드프리 왕자는 맥길 왕을 무시한 채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집회실 문을 열어보니 문 밖에 경비병 두 명이 보였다.

영문을 모르는 경비원들이 노여움에 가득 찬 맥길 왕의 눈치만 살필 뿐이었다.

그러나 고드프리 왕자는 아랑곳 않고 경비원들을 지나 복도로 걸어갔다.

“왕자를 억류하라!”

왕이 소리질렀다.

“잡아서 왕비 눈에 뛰지 않게 가두거라. 공주의 결혼식에 저 녀석까지 제 어미를 신경 쓰게 만드는 꼴은 못 보겠구나.”

“네, 폐하.”

경비병들은 문을 닫고 재빨리 왕자에게 뛰어갔다.

얼굴이 붉어진 왕은 진정하기 위해 애써 숨을 가다듬었다. 수천 번도 넘게 무슨 잘못을 했기에 고드프리 같은 자식을 얻었는지 의문을 품었다.

왕은 다시 남은 자식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네 명 모두 침묵 속에서 왕을 바라보고 있었다. 왕은 크게 숨을 쉬며 본론으로 들어갔다.

“이제 두 사람 남았구나. 이 둘 중에서 후계자를 지목하겠다.”

왕은 공주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웬돌린, 네가 지목됐다.”

왕을 제외한 모두가 경악했다. 자식들 모두가, 그리고 그 중에서도 그웬돌린 공주가 가장 충격 받았다.

“정확하게 말씀하신 건가요, 폐하?”

개리스 왕자가 재차 확인했다.

“그웰돌린이라고 말씀하신 건가요?”

“폐하, 영광스럽습니다.”

그웬돌린 공주가 입을 열었다.

“그렇지만 따를 수가 없어요. 전 여자잖아요.”

“그렇긴 하지, 맥길 왕가에서 여자의 몸으로 왕위에 오른 일은 없었지. 그러나 이제는 전통을 바꿀 때도 됐다는 판단이 섰구나. 그웬돌린, 넌 내가 지금껏 봐온 그 어느 소녀보다 마음과 정신이 훌륭하단다. 아직 왕위에 오르긴 젊지만, 신의 가호가 있다면 이 아비가 그리 빨리 죽진 않을 거다. 그리고 네가 왕위에 오를 즈음이면 충분히 왕국을 다스릴 만큼 현명해져 있을 거다. 왕국은 네 소유가 될 거다.”

“그렇지만 폐하!”

언성을 높인 개리스 왕자의 얼굴은 이미 잿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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