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이요, 공주님?” 사령 집행관이 물었다. “그렇지만 폐하께서 시체를 무기한으로 매달아두라고 명하셨습니다.”
그웬 공주는 고개를 저었다.
“지금 당장.” 공주가 대답했다. “이게 폐하의 명령이네.” 공주가 거짓말을 전했다.
공주는 다시 한번 자신의 거짓말이 정당하다고 생각했다. 분명 개리스 왕은 창 밖을 내려다보며 펄스의 시체를 하루에도 몇 번이나 확인할 게 분명했다. 펄스의 시체를 치우면 개리스 왕의 심기가 불편해질 게 자명했다. 이는 곳 개리스 왕에게 모든 일이 자신의 계획대로만 되지는 않을 거라는 걸 알리는 공주의 경고이기도 했다.
그웬 공주가 다시 발걸음을 재촉할 무렵, 저 멀리서 새의 울음 소리가 들렸다. 공주는 발걸음을 멈추고 저 멀리 높은 하늘을 바라봤다. 그곳에는 에스토펠레스가 있었다. 공주는 한 손을 올려 강렬한 햇빛에 눈가를 가리고 자신이 정말 에스토펠레스를 본 건지 다시 한번 확인했다. 공중에서 에스토펠레스가 다시 한번 울부짖으며 날개를 크게 펼쳤다.
순간 공주에게 좋은 생각이 하나 떠올랐다. 공주는 한 손을 뻗고 휘파람을 불어 에스토펠레스를 불렀다. 에스토펠레스는 순식간에 하강하여 공주의 손목 위에 안착했다. 에스토펠레스의 무게가 상당했고, 매의 발톱이 공주의 피부를 짓눌렀다.
“토르에게 가보렴.” 공주가 에스토펠레스에세 속삭였다. “전쟁에서 토르를 찾아 토르를 보호해줘. 어서 가렴!” 공주가 손을 하늘 위로 올리며 소리쳤다.
공주는 에스토펠레스가 날개 짓을 하며 하늘 높이 날아오르는 모습을 지켜봤다. 에스토펠레스가 토르를 지켜주기를 기도했다. 에스토펠레스에게는 무언가 마법 같은 힘이 있었다. 특히 토르와 에스토펠레스 사이에는 알 수 없는 교감이 있었기에 공주는에스토펠레스가 든든한 지원군이 되어 줄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공주는 다시 걸음을 재촉해 왕실의 의원이 머무는 곳으로 서둘러 걸어갔다. 공주 일행은 여러 개의 아치형 문을 통과해 왕실 밖으로 벗어났고 최대한 빨리 이동했다. 공주는 고드프리 왕자가 도움을 손길을 받을 수 있게 생명 끈을 꼭 붙잡고 있길 바랬다.
왕실을 벗어나 작은 언덕을 오를 무렵 어느덧 두 번째 태양이 저물고 있었다. 때마침 왕실 의원이 머무는 집이 시야에 들어왔다. 작은 집이었다. 방은 하나밖에 없었으며 백토로 벽을 발라 마감된 짐이었다. 양 쪽으로 작은 창문이 나 있었고 정면에는 아치형의 오크나무로 만든 대문이 있었다. 지붕에는 온통 온갖 종류의 약재와 형형색색의 다양한 식물들이 매달려 있었다. 그 모습이 마치 작은 오두막이 식물원에서 튀어나온 듯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공주는 서둘러 대문으로 달려가 몇 번이나 문을 두드렸다. 오두막의 문이 열렸고 공주 앞에 왕실 의원이 모습이 나타났다.
일레프라. 그녀는 한 평생을 왕실 의원으로 왕족들을 치료했다. 공주는 어렸을 때부터 그녀를 알고 지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레프라는 여전히 젊은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사실, 공주보다도 조금 성숙해 보일 뿐이었다. 그녀의 피부는 아름답게 윤이 났고, 상냥하고 부드러운 초록빛 눈동자를 지니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은 약 18세 정도의 젊은 여성에 불과해 보였다. 그웬 공주는 일레프라의 실제 나이가 그보다 훨씬 많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녀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젊어 보인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일레프라는 또한 공주가 아는 몇 안 되는 매우 명석하고 유능한 사람 중 한 사람이었다.
공주 일행을 본 일레프라의 시선은 단번에 고드프리 왕자를 향했다. 일레프라는 걱정이 앞선 눈빛으로 상황이 절박하다는 걸 짐작하고 공주를 반기는 일을 생략했다. 일레프라는 서둘러 고드프리 왕자에게 다가가 손으로 그의 이마를 짚어 보고는 눈썹을 찌푸렸다.
“안으로 모시세요.” 일레프라가 서둘러 고드프리 왕자를 부축해온 아코드와 펄톤에게 말했다. “빨리 서둘러 주세요.”
일레프라는 다시 집 안으로 들어가 대문을 활짝 열었고, 공주 일행은 서둘러 안으로 들어갔다. 공주는 일행 중 가장 마지막으로 고개를 숙여 작은 문 안으로 들어가 등 뒤로 문을 닫았다.
집 안이 어두워 시야를 확보하는데 잠시 시간이 걸렸다. 어둠에 익숙해지자 어린 시절 이곳을 찾았을 때 봤던 그때 그대로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작고, 따뜻하고, 깨끗하고 다양한 식물과 약초와 온갖 종류의 물약이 가득한 공간이었다.
“이곳에 왕자님을 눕히세요.” 일레포라가 심각한 어조로 두 사람에게 말했다. “저기 모퉁이에 있는 침대에요. 셔츠와 신발을 벗겨주시고 자리를 좀 비켜주세요.”
아코드와 펄톤은 그녀의 말에 따랐다. 두 사람이 왕자를 눕히고 문 밖으로 나가려던 때 공주는 아코드의 팔을 붙잡았다.
“문 밖에서 망을 봐줘.” 공주가 명령했다. “누구든지 고드프리 오빠를 쫓는 자는 아직도 고드프리 오빠를 노리고 있을 거야. 또는 나를 노리거나.”
아코드는 고개를 끄덕였고 펄톤과 함께 문 밖으로 나갔다.
“이 상태로 얼마나 있었던 거죠?” 일레프라가 고드프리 왕자 곁에 무릎을 꿇고 앉아 왕자의 손목과 배와 목의 맥을 짚으며 공주를 바라보지도 못하고 다급하게 물었다.
“어젯밤부터야.” 공주가 대답했다.
“어젯밤이라고요!” 일레프라가 따라 외쳤다. 그녀의 목소리엔 걱정과 우려가 가득했다. 일레프라는 오랫동안 말 없이 고드프리 왕자를 진찰했고, 표정은 더욱 어둡게 변했다.
“상황이 좋지 않습니다.” 일레프라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일레프라는 다시 한번 고드프리 왕자의 이마를 짚고 두 눈을 감은 뒤 아주 오랫동안 숨을 골랐다. 오랜 시간 동안 방 안은 깊은 침묵이 흘렀고, 그웬 공주는 그런 그녀의 모습이 초초해 더 이상 보고만 있기만 힘들었다.
“독약.” 마침내 일레프라가 입을 열었다. 그녀는 여전히 두 눈을 감고 있었다. 마치 마음으로 고드프리 왕자의 상태를 진단하고 있는 듯 보였다.
그웬 공주는 이번에도 역시 그녀의 능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레프라는 일평생 병명을 정확하게 짚어내지 못한 일이 없었다. 그녀 혼자서 군대가 사람을 구한 것보다 더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살려냈다. 그녀의 그런 능력이 학습에 의한 것인지 천부적으로 타고난 재능인지 알 수 없었다. 일레프라의 어머니 또한 의원이었고 그 어머니의 어머니 또한 의원이었다. 그럼에도 일레프라는 모든 시간을 독극물을 연구하고 그에 대한 치유법을 연구하는데 열중했다.
“매우 강력한 독이에요.” 일레프라가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흔히 접하지 못하는 독이죠. 아주 귀하고 값비싼 독이에요. 고드프리 왕자님을 해하려 한 사람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무슨 독을 써야 왕자님을 해칠 수 있는지 분명히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에요. 왕자님이 아직까지 살아있다는 게 믿기지가 않아요. 왕자님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강하신 분인가 봐요.”
“아버지께 물려받은 강인함이지.” 그웬 공주가 대답했다. “고드프리 오빠는 강인한 체력을 가졌어. 모든 맥길 왕가의 후손들이 그러하듯, 체력을 타고났지.”
일레프라는 방을 가로질러 나무 판 위에 몇몇 약초를 올려두고 섞기 시작했다. 각각의 약초들을 빻아서 갈아둔고 그곳에 액체를 넣어 혼합했다. 그렇게 완성한 약은 녹색의 진득한 연고 같은 모습이었다. 일레프라는 손바닥에 연고를 가득 얹어 서둘러 고드프리 왕자에게 다가가 그의 목과 겨드랑이와 이마에 연고를 발랐다. 그리고 나서 다시 방을 가로질러 유리병에 담긴 불은 색, 갈색, 보라색이 나는 액체를 섞기 시작했다. 액체가 서로 섞이면서 연기가 일어났다. 일레프라는 혼합한 액체에 나무 숟가락을 넣어 오랫동안 저은 뒤 다시 고드프리 왕자에게 달려가 그의 입술에 액체를 발랐다.
고드프리 왕자는 아무런 미동도 없었다. 일레프라는 한쪽 팔로 고드프리 왕자의 머리를 일으켜 세우고 혼합한 액체를 왕자의 입술 사이로 밀어 넣어 입 속에 집어넣었다. 대부분의 액체가 입 옆으로 흘러나왔지만 그 중 일부는 목구멍 안으로 타고 몸 속에 들어갔다.
일레프라는 왕자의 입 밖으로 흘러나온 액체를 닦고 다시 왕자의 입가를 닦았다. 그리고는 그제서야 등을 기대고 한 숨을 쉬었다.
“오빠가 살 수 있겠어?” 공주가 초조하게 물었다.
“아마도요.” 일레프라의 어조가 침울했다. “제가 할 수 있는 건 다 했어요. 그렇지만 충분하지 않아요. 이제 왕자님의 목숨은 왕자님의 운명에 달려 있어요.”
“내가 할 수 있는 게 있을까?” 그웬 공주가 절실하게 물었다.
일레프라는 고개를 돌려 그웬 공주와 눈을 맞췄다.
“왕자님을 위해 기도해 주세요. 긴 밤이 될 거에요.”
제 5장
캔드릭 왕자는 오늘에서야 진정한 자유의 의미를 만끽할 수 있게 됐다. 캔드릭 왕자의 마음 속에는 그 동안 지하 감옥에서 지냈던 시간이 떠올랐다. 덕분에 이제는 작은 것 하나까지도 소중히 감사할 줄 아는 마음이 들었다. 내리쬐는 태양, 머리를 스치는 바람과 같이 바깥 세상에서 느끼는 모든 것이 감사했다. 말을 타고 달리며, 주변으로 흘러가는 풍경을 느끼며, 다시 실버 전사로 돌아와 다시 무기를 걸치고 동료 전사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말을 달리는 이 순간이 마치 대포를 맞은 듯 기존에는 느껴보지 못했던 무모한 기분마저 들게 했다.
캔드릭 왕자는 몸을 낮추고 바람을 가르며 전속력으로 질주했다. 그의 옆에는 친한 동료 아트미가 말을 달리고 있었다. 이렇게 동료 실버 전사들과 함께 싸울 수 있다는 사실에, 이번 전투에 참여할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맥클라우드 왕가가 점령한 마을을 되찾고 그들에게 침략의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하리라 굳게 다짐했다. 캔드릭 왕자는 한 시라도 빨리 피 흘리는 전투를 맞을 생각에 전속력으로 질주했다. 그는 사실 지금 그가 느끼는 분노와 노여움이 맥클라우드 왕가가 아닌, 자신의 동생 개리스를 향해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캔드릭 왕자는 자신을 구금 시킨 것도 모자라 자신에게 아버지의 암살자라는 누명을 씌우고, 동료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자신을 연행하고 또 처형하려 계획했던 개리스 왕을 절대 용서할 수 없었다. 개리스 왕에게 보복을 해야만 했다. 그러나 상황이 여의치 않은 지금, 적어도 오늘 당장 보복을 할 수 없기에 캔드릭 왕자는 그 분노를 맥클라우드 왕가에 돌리고 있었다.
캔드릭 왕자는 왕실로 돌아가 모든 것을 바로잡을 심산이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해 개리스 왕을 왕좌에서 끌어내리고 여동생 그웬돌린 공주를 새로운 지도자로 세울 생각이었다.
전속력으로 말을 달리다 보니 군대는 어느덧 약탈당한 도시에 가까이 다가갔다. 엄청나게 거대한 검은 연기와 구름이 군대 앞에 펼쳐졌고 탁하고 매운 연기가 캔드릭 왕자의 코를 찔렀다. 이렇게 처참히 짓밟힌 도시를 보고 있자니 캔드릭 왕자는 마음이 아팠다. 만약 아버지께서 살아 계셨다면 절대 벌어지지 않을 일이었다. 만약 개리스가 후계를 잇지 않았다면 절대 일어나지 않을 일이었다. 맥길 왕가와 실버 전사에게 있어 이는 불명예스러운 오점으로 남을 일이었다. 캔드릭 왕자는 백성들과 마을을 구하기에 군대가 너무 늦지 않게 도착했기 만을 간절히 빌었다. 맥클라우드 왕가가 저 곳에 도착한지 오래 되지 않았기를, 너무 많은 사상자들이 발생하지 않았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캔드릭 왕자는 더욱 박차를 가해 다른 전사들보다 앞서 나갔다. 모든 전사들은 엄청난 속도의 벌떼처럼 일제히 도시의 입구를 향해 전속력으로 질주했다. 모두가 하나의 움직임으로 달렸다. 캔드릭 왕자는 맥클라우드 군대와 맞서기 위해 검을 뽑아 들고 도시 안으로 진입하며 크게 기합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다른 전사들도 일제히 함성을 지르며 전쟁에 대비했다.
그러나 먼지가 가득한 도시 안으로 진입한 캔드릭 왕자는 눈 앞의 광경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도시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주변으로는 온통 침략이 벌어진 후 남은 잔재들뿐이었다. 망가진 도시와, 이곳 저곳에서 일어난 불과 붕괴된 집들과 쌓여있는 시체와 바닥에 널브러진 여인들의 모습뿐이었다. 가축들은 도살 당했고 벽마다 핏자국이 선명했다. 어마어마한 대학살의 현장이었다. 맥클라우드 왕가는 이곳의 선량한고 무고한 백성들을 모두 비참이 유린했다. 눈 앞의 광경에 도저히 분노를 금할 길이 없었다. 왕자는 맥클라우드 왕가의 비겁한 행동에 화가 치밀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캔드릭 왕자를 의아하게 만든 건 그 어디에서 맥클라우드 왕가의 군대가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이해할 수가 없었다. 마치 전 군대가 의도적으로 자리를 피한 것 같은 모습이었다. 마치 맥길 왕가의 군대가 이곳에 온다는 걸 미리 알고 있었던 눈치였다. 여전히 곳곳에서 일어나는 불길을 보아하니 맥클라우드 왕가에서 일부러 맥길 왕가의 군대를 유인하기 위해 불을 피우고 달아난 게 분명했다.
이렇게 유인을 한 이유가 무엇인지 캔드릭 왕자는 고심했다. 왜 맥클라우드 왕가의 군대는 맥길 왕가의 군대를 이곳으로 유인했는지 이유를 알아야 했다.
대체 왜 그랬단 말인가?
캔드릭 왕자는 신속히 주변을 둘러보며 혹시 사라진 병사들이 없는지, 혹시 다른 곳으로 유인 당한 병사들은 없는지 빠르게 살폈다. 캔드릭 왕자는 이 모든 것이 자신의 병사들을 따로 유인해 그들을 매복하기 위한 계략이었다는 생각이 빠르게 들었다. 왕자는 샅샅이 곳곳을 살피며 어느 병사들이 사라졌는지 가늠했다.
그리고 순간 캔드릭 왕자의 머릿속에 한가지 생각이 스쳤다. 한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왕자의 후견부대원.
토르.
제6장
언덕의 정상에서 말에 앉아 있는 토르의 곁에는 부대원 친구들과 크론이 함께 있었다. 토르는 눈 앞에 펼쳐진 믿지 못할 광경을 바라봤다. 시선이 닿는 모든 곳에 엄청난 병력의 맥클라우드 병사들이 말을 타고 토르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토르 일행은 그렇게 함정에 빠졌다. 포그 지휘관이 분명 목적을 가지고 이들을 이곳으로 인도한 게 분명했다. 그가 이들을 배신한 것이었다. 그러나 도대체 왜 그랬단 말인가?
토르는 침을 꿀꺽 삼키며 눈 앞에 닥친 죽음의 위기를 바라봤다.
맥클라우드 왕가의 병사들이 크게 함성을 지르며 토르 일행을 향해 돌진하고 있었다. 그들은 불과 몇 백 미터 거리에서 대기하고 있었고 부대원들이 정상에 오르자 빠르게 접근했다. 재빨리 뒤를 돌아 봤지만, 토르 일행을 지원해줄 병력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완전히 고립된 상황이었다.
토르는 이곳에서 마지막을 장식하는 것 외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이 작은 언덕에서, 오랫동안 버려진 유적지가 있는 이 곳이 바로 토르가 죽을 자리였다. 토르 일행에게 승산은 없었다. 토르와 부대원들이 저 많은 맥클라우드 왕가의 병력을 무찌를 방법이라는 게 존재할 리가 만무했다. 어차피 죽을 바에는 진정한 전사로서 정의롭게 싸우다 죽고 싶었다. 왕의 부대에서 훈련을 하며 명예로운 죽음이란 무엇인지 확실하게 깨우친 토르였다. 도망가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눈 앞에 닥친 죽음을 겸허히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토르는 고개를 돌려 부대원 친구들의 얼굴을 살폈다. 그들 또한 토르처럼 공포에 질려 창백한 얼굴이었다. 그들도 토르와 똑같이 죽음을 예상한 것 같았다.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용감하게 죽음에 맞서기로 한 모습이었다. 토르 일행이 탄 말들이 겁에 질려 이리저리 움직였지만 부대원들은 그 누구도 주춤하지 않고 자신의 자리를 지켰고 그 누구도 도망가려 하지 않았다. 부대원들은 하나의 공동체였다. 친구 그 이상이었다. 백일 훈련을 함께 받으며 토르와 친구들은 어느덧 형제애로 뭉치게 됐다. 부대원들 모두가 서로의 곁을 지켰다. 모두가 자신의 명예를 지키겠다는 맹세를 마친 부대원들이었다. 그리고 부대원들에게는 비루하게 목숨을 구하는 것보다 명예가 더 중요했다.
“친구들이여, 우리 앞에 전쟁이 펼쳐질 거야.”리스 왕자가 천천히 말을 뱉으며 검을 꺼내 들었다.
토르는 허리춤에서 새총을 꺼냈다. 맥클라우드 왕가의 군대가 근접하기 전 최대한 많은 적군들을 쓰러뜨리기 위함이었다. 오코너는 짧은 창을 꺼냈고 엘덴은 투창을, 콘발은 헤머를, 콘벤은 창살을 꺼냈다. 토르와 안면이 없는 다른 부대원들도 각각 검과 방패를 꺼내 전투에 대비했다. 긴장과 두려움이 가득했다. 토르 또한 두려움을 느꼈다. 천둥번개 같은 말발굽 소리가 울려 퍼지고 하늘을 찌르는 듯한 맥클라우드 왕가의 병사들의 기합소리가 울리자 마치 엄청난 천둥이 토르 일행을 향해 달려드는 것 같았다. 적에게 맞설 전략이 필요했다. 그러나 병법이라곤 아는 게 없었다.
토르의 곁에 있던 크론이 으르렁거렸다. 그런 크론의 모습에 토르는 깊은 영감을 받았다. 크론은 지금껏 위기 앞에서 한번도 도망가거나 두려워한 적이 없었다. 오히려 크론은 털을 잔뜩 세우고 으르렁거리며 혼자서 모든 병사들을 상대할 기세로 점점 앞으로 나가고 있었다. 토르는 크론이야말로 진정한 전쟁의 협력자라는 걸 새삼 깨달았다.
“다른 병사들이 우릴 지원하러 와줄까?” 오코너가 물었다.
“제 시간에 오긴 힘들 거야.” 엘덴이 대답했다. “포그 지휘관이 우릴 함정에 빠뜨렸어.”
“그렇지만 왜 그런 거지?” 리스 왕자가 물었다.
“잘 모르겠어요.” 토르가 말을 타고 앞으로 나서며 대답했다. “그렇지만 그가 그런 이유가 저 때문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어요. 누군가 제가 죽길 바라는 것 같아요.”
부대원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려 토르를 바라봤다.
“왜?” 리스 왕자가 물었다.
토르는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토르 또한 알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토르는 이 모든 것이 선대 맥길 왕의 암살과 관련된 왕실의 음모로 인해 발생했다는 사실을 눈치채고 있었다. 가장 의심이 가는 인물은 개리스 왕이었다. 아마도 그가 토르를 위험 인물이라 판단한 듯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