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르는 부대원 친구들까지 위험에 빠뜨리게 한 사실에 큰 죄책감을 느꼈다. 그러나 지금 토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이곳에서 가만히 죽음을 기다릴 수는 없었다. 오히려 가장 먼저 선제 공격에 나서 적들의 시선을 교란해 나머지 부대원들이 도망갈 수 있는 시간을 벌어주고 싶었다. 어차피 죽을 운명이라면, 겁먹지 않고 명예롭게 죽음을 맞이하고 싶었다.
속으론 많이 떨었지만 겉으론 태연하게 보이려 최대한 애를 썼다. 토르는 부대원들을 두고 더욱 앞으로 전진하며 달려나가 토르 일행을 향해 달려오는 병사들을 향해 달렸다. 토르 옆에는 크론이 바짝 붙어 달렸다.
토르의 뒤에서 부대원들의 기합소리가 들렸다. 모든 부대원 일행이 전속력으로 질주해 토르 뒤를 바짝 쫓으며 전진했다. 부대원 일행은 토르와 불과 20미터 정도 떨어져 있었다. 모두가 기합 소리를 질러대며 전속력으로 전쟁을 향해 달렸다. 토르는 계속해서 선두에서 달려나갔고, 부대원들의 지원이 든든하게 느껴졌다.
토르의 맞은편에는 맥클라우드 왕가의 선발대 병사들이 전속력으로 토르에게 돌진하고 있었다. 약 50여명 정도 돼 보였다. 100미터 정도의 거리에서 빠르게 토르를 향해 달려왔다. 토르는 새총을 꺼내 돌을 장착하고 목표물을 정해 신속하게 날렸다. 토르의 목표물은 가장 리더로 보이는 듯한 큰 체구의 은색 흉갑을 두른 병사였다. 토르는 목표물을 정확하게 맞췄다. 토르는 새총으로 상대편 병사의 갑옷 바로 위로 드러난 목 부분을 맞췄고 가장 선두에서 달려오던 병사는 말에서 떨어져 바닥 위를 굴렀다.
그가 떨어지는 동시에 그의 말도 함께 바닥에 굴렀고 그 바람에 그의 뒤에서 달려오던 수십 명의 병사들이 타고 있던 말이 서로의 발에 걸려 서로 부딪히며 다 함께 한데 엉켜 땅 위를 나뒹굴었다.
맥클라우드 병사들이 어떻게 손을 쓰기도 전에 토르는 다시 한번 새총을 장착해 목표물을 향해 날렸다. 이번에도 한치의 빈틈도 없는 명중이었다. 토르는 또 다른 리더로 보이는 병사의 관자놀이를 정확하게 조준했고 새총에 맞은 병사가 쓰러지며 그 뒤를 따르던 나머지 병사들도 도미노처럼 일제히 말에서 떨어져 바닥을 굴렀다.
선두로 나선 토르의 뒤에서 상대편 병사들을 향해 투창과 창이 날아갔고 이후 해머와 창살이 날아갔다. 토르는 뒤에서 달려오는 부대원들이 적군을 향해 함께 공격해주며 토르를 지원해주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부대원들은 모두 결의가 대단해 보였다. 부대원들이 던진 무기는 맥클라우드 왕가의 병사들을 맞혔고 몇몇 병사들이 말에서 굴러 떨어지며 그들 뒤에서 전속력으로 질주하던 다른 병사들마저 그들에게 길이 막혀 제각각 말에서 떨어졌다. 그 덕분에 눈 앞에는 엄청난 먼지 바람이 일어났다.
그러나 맥클라우드 왕가의 군대는 막강하기 그지 없었다. 이번엔 그들이 반격에 나섰다. 토르와 적군과의 거리가 30미터 정도로 좁혀졌을 무렵 맥클라우드 왕가의 병사들은 토르를 향해 갖가지 무기를 던지며 공격에 나섰다. 해머가 날아오자 토르는 고개를 숙였다. 다행히 찰나의 순간에 해머가 토르의 오른 쪽 볼을 아슬아슬하게 비켜 지나갔고, 윙 하는 소리가 바로 그의 귓가를 세게 스치며 지나갔다. 눈앞에서 날아오는 창을 피해 토르는 신속히 몸을 숙였다. 창 끝이 갑옷을 조금 뜯고 지나갔지만 다행히 다친 곳은 없었다. 창살이 토르의 얼굴을 향해 정면으로 날아오자 토르는 방패를 들어올려 날아오는 창살을 막았다. 창살이 그대로 방패에 박혔고 토르는 방패를 내리고 손을 뻗어 방패에서 창살을 뜯어 다시 적군에게 창살을 날렸다. 토르가 던진 창살은 적군의 갑옷을 뚫고 그대로 가슴에 박혔다. 창살을 맞은 적군은 소리를 지르며 말에서 떨어져 그대로 즉사했다.
토르는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갔고 죽을 각오와 함께 적군의 어마어마한 병력 속으로 돌진해 들어갔다. 토르는 어마어마한 기합 소리와 함께 검을 빼 들어 크게 함성을 질렀다. 토르의 뒤로 부대원 친구들이 함께하며 모두가 큰 소리로 죽을 각오를 하듯 크게 함성을 외쳤다.
무기가 부딪히며 울리는 쩌렁쩌렁한 소리와 함께 엄청난 충격이 느껴졌다. 수염이 덥수룩한 거구의 전사가 토르를 향해 달려들어 양 손의 도끼를 공중으로 처 들어올린 뒤 토르의 목을 겨냥하며 힘껏 내리쳤다. 토르는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도끼를 피해 허리를 숙이는 동시에 적군의 배를 검으로 베었다. 적군은 그대로 비명을 지르며 말에서 떨어졌고 그의 양 손에 쥐어있던 도끼는 공중으로 날아갔다. 공중으로 날아간 도끼는 다른 맥클라우드 병사가 타고 있던 말을 내리 찍었고 그 덕에 말에 타고 있던 병사가 말에서 떨어지며 다른 병사들의 진로를 방해했다.
토르는 계속해서 엄청난 병사들이 포진해있는 적군들의 무리 속을 파고들었다. 눈 앞을 막고 있는 수백 명의 병사들을 가르며 그들이 겨누는 칼날과 도끼와 철퇴를 막고 피하며 반격하면서 다시 검으로 적군들을 찌르고 다시 몸을 숙여 공격을 막아내는 동시에 앞으로 돌진했다. 그들의 예상과는 달리 토르는 너무 민첩하고 너무 날쌨다. 어마어마한 병력의 군대임에도 불구하고 맥클라우드 병사들은 엄청난 속도로 움직이며 돌진하는 토르를 막아내지 못했다.
토르가 돌진하는 곳곳마다 금속이 부딪히는 어마어마한 소리가 들렸다. 곳곳에서 토르를 향한 강력한 무기들이 날아들었고 토르는 방패를 들어올리고 검을 휘두르며 모든 공격을 하나하나 막아냈다. 그러나 그 많은 공격을 모두 감당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적군이 휘두른 검이 토르의 어깨를 스쳤다. 피가 흘러나왔고 참을 수 없는 고통에 비명이 절로 나왔다. 천만 다행으로 검은 살짝 스쳐 지났을 뿐이었다. 부상은 심하지 않았다. 그 정도 부상에는 끄떡도 없었다. 토르는 계속해서 반격에 나섰다.
맥클라우드 병사들에게 둘러싸인 토르는 양 손으로 적군들의 공격을 막아내며 반격했고 부대원들이 토르 편에 서서 함께 공격하자 이내 적군들의 수가 눈에 띄게 줄기 시작했다. 맥클라우드 병사들이 토르 외에 다른 부대원들을 상대하며 무기가 부딪히는 소리는 더욱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검과 방패가 부딪히고 창이 말을 찌르고 투창이 적군의 갑옷을 뚫으며 곳곳에서 혈투가 벌어졌고 사방에서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부대원들은 유리한 지점에 있었다. 민첩함으로 무장한 10명의 소규모 부대원들은 거대한 적군들의 한 가운데 심장부에 위치해 있었다. 정 중앙에 부대원 일행을 놓고 맥클라우드 병사들이 이들을 둘러쌓고 있었다. 결국 서로가 서로를 막아서는 형국으로 맥클라우드 병사들은 수 많은 병력에도 불구하고 한번에 다같이 부대원 일행을 공격할 수가 없었다. 토르는 한번에 두 명 또는 세 명의 적군들을 상대했다. 적군들이 서로를 막고 있어 그 이상의 공격은 없었다. 토르의 뒤로는 부대원들이 주둔하여 뒤에서 공격하는 적군들을 막아주고 있었다.
한 병사가 토르가 다른 병사들과 전투를 벌이는 틈을 타 토르의 머리 위로 철퇴를 휘둘렀지만, 때마침 크론이 으르렁거리며 병사를 공격했다. 크론은 높이 뛰어올라 적군의 팔을 물어 뜯어 사방으로 적군의 피가 흩어졌다. 그 덕분에 적군이 휘두른 철퇴는 방향을 잃고 다른 곳으로 향했고 다행히 토르의 머리는 무사할 수 있었다.
정신 없이 싸우다 보니 적군과 맞서고 적군을 베고 사방에서 날아오는 공격을 피해내는 모든 장면이 흐릿하게 느껴졌다. 토르는 자신이 가진 모든 기술을 총 동원해 공격을 막았고, 다시 반격에 나서고 틈틈이 다른 부대원들을 도우며 동시에 스스로를 방어했다. 본능적으로 그간 습득해 온 모든 훈련 기술을 발휘했다. 어떠한 상황에서든지 자신을 둘러싼 모든 곳에서 이뤄지는 공격을 막아내는 기술을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런 기술들이 이미 토르의 몸에 베어 있었다. 왕의 부대는 훌륭하게 부대원들을 훈련시켰다. 어느덧 이 전쟁이 익숙해져 가며 적응해버린 토르였다. 두려움은 여전히 마음 속에 남아 있었지만, 그 두려움에 휩싸이는 대신 스스로의 공포를 자제하고 조종할 수 있었다.
토르는 계속해서 적군과 대결했다. 계속되는 싸움에 서서히 양쪽 팔의 움직임이 무거워졌고 어깨에 통증이 더해졌을 무렵, 콜크 사령관이 전해줬던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너희들의 적들이 절대 너희들의 방식으로 공격할거라 착각하지 말거라. 그들은 그들의 방식으로 싸운다. 너희에겐 전장이지만 그들에겐 다른 의미일 수도 있다
순간 토르는 작은 키에 어깨가 넓은 적군이 양 손에 돌기가 있는 쇠사슬을 높이 들고 뒤에서 리스 왕자를 향해 돌격하는 모습을 포착했다. 리스 왕자는 상대 적군을 보지 못했다. 순식간에 리스 왕자의 목숨이 날아갈 판국이었다.
토르는 재빨리 말에서 뛰어내려 공중으로 몸을 날렸고 적군이 왕자의 목에 쇠사슬을 감지 직전 서둘러 그를 가격했다. 적군은 말과 함께 바닥으로 엎어지며 토르와 함께 바닥을 뒹굴었다. 토르는 그대로 계속해서 바닥 위를 굴러갔다. 토르 주변으로 바람이 휘몰아쳤고 곳곳에서 말들이 발을 굴렀다. 토르는 떨어진 적군을 놓지 않고 땅에서 계속 제압했다. 상대편 적군이 엄지를 치켜들고 토르의 눈알을 파내려는 찰나, 토르는 새 울음 소리를 들었다. 이내 어디선가 에스토펠레스가 날아와 적군의 눈을 발톱으로 할퀴었다. 적군은 눈을 감싸며 비명을 질렀고 토르는 순간을 놓치지 않고 팔꿈치로 적군을 가격해 그를 쓰러뜨렸다.
적군을 무찔렀다는 안도감을 느낄 겨를도 없이 누군가가 토르의 복부를 세차게 가격하는 바람에 토르는 그대로 뒤로 쓰러졌다. 고개를 들어보니 적군 한 명이 양 손에 도끼를 쥐고 토르의 가슴을 향해 휘두르고 있었다.
토르는 재빨리 몸을 돌려 피했고 토르를 향해 날아오던 도끼는 아무런 소득 없이 허공을 갈랐다. 죽기 일보직전의 순간이었다.
때마침 크론이 토르를 공격하던 적군에게 달려들었다. 크론은 공중으로 뛰어올라 송곳니로 적군의 팔꿈치를 물었다. 적군은 손을 뻗어 몇 번이나 크론을 세게 내리쳤지만 크론은 꿈쩍도 않고 버티며 깨문 팔꿈치를 절대 놓지 않았고 결국엔 적군의 팔꿈치 살점이 크론과 함께 떨어져 나갔다. 적군은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쓰러졌다.
적군은 다시 일어나 크론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그러나 토르가 재빨리 나서 방패로 적군의 검을 막아냈다. 방패를 쥔 손에 일어난 엄청난 타격의 충격이 토르의 온 몸으로 전해졌다. 다행히 크론의 목숨을 살릴 수 있었다. 그러나 방패를 뻗어 크론을 방어한 토르 자신은 무방비 상태였다. 그때 말을 탄 또 다른 병사가 토르에게 달려가 말로 토르를 밟았다. 말발굽에 얼굴을 밟힌 토르는 계속해서 자신의 몸을 짓누르는 말의 발길에 온 몸의 뼈가 부서져 나가는 듯 했다.
곧이어 더 많은 병사들이 말에서 내려 토르를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말에서 내려온 건 큰 실수였다. 다시 말에 올라탈 수가 있다면 무엇이든지 하고 싶었다. 바닥에 쓰러진 토르는 엄청난 고통을 느끼며 주변을 살폈지만 다른 부대원들도 모두 적군에 맞서느라 정신 없는 모습이었다. 부대원들은 점점 기세가 꺾이고 있었다. 토르와 일면이 없던 부대원 한 명이 엄청난 비명을 외쳐댔다. 돌아보니 적군의 칼이 그의 가슴을 꿰뚫었고 칼에 찔린 부대원은 말에서 떨어지며 그대로 사망했다.
일면이 없던 또 다른 부대원이 사망한 부대원을 돕기 위해 급히 달려와 부대원을 죽인 병사를 창살로 찔렀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또 다른 적군이 뒤에서 달려들며 검으로 그의 목을 베는 바람에 해당 부대원은 고통으로 신음하며 말에서 떨어져 목숨을 잃었다.
토르에겐 6명의 적군들이 달려들었다. 한 병사는 검을 들어 토르의 얼굴을 향해 검을 내리쳤다. 토르는 방패를 높이 들어 그의 검을 막았고 그와 동시에 귓가에 금속이 부딪히는 쩌렁쩌렁한 소리가 크게 울렸다. 그러나 순식간에 토르의 측면에서 한 병사가 토르의 손을 발로 차 토르가 쥐고 있던 방패를 멀리 내팽개쳐버렸다.
또 다른 병사는 토르의 손목을 발로 밟아 토르를 바닥에 고정시켰다.
그 옆에 있던 병사가 때맞춰 창을 높이 놀려 토르의 가슴을 향해 청을 내리 꽂았다.
토르는 재빨리 몸을 돌렸고 크론이 창을 내리꽂는 병사에게 달려들어 그를 넘어뜨렸다. 그러나 다른 병사가 곤봉을 휘두르며 크론을 세게 가격하자 크론은 비명을 지르며 바닥으로 떨어졌고 그대로 쓰러져 아무런 미동도 하지 않았다.
다른 병사가 토르를 향해 달려와 토르의 눈앞에서 잔뜩 찌푸린 인상으로 삼지창을 들어올렸다. 그러나 토르를 도와줄 사람은 그 누구도 없었다. 병사는 토르의 얼굴을 향해 정면으로 삼지창을 내리 꽂았다. 토르는 적군에게 붙잡혀 바닥에 고정된 체 무방비 상태로 적의 공격을 받아야 했다. 지금 이 순간이 생애 마지막이라는 생각을 머릿속에서 지울 수가 없었다.
제7장
그웬 공주는 비좁은 오두막 안에서 고드프리 왕자 곁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두 사람 곁에는 일레프라도 함께였다. 공주는 더 이상 견디기가 힘들었다. 벌써 수 시간째 이어지는 고드프리 왕자의 신음소리를 들으며 일레프라의 표정이 계속해서 어두워지는 모습을 더 이상은 지켜보기가 버거웠다. 고드프리 왕자의 죽음이 눈앞에 닥친 게 확실했다. 그러나 속수무책인 상황이었다. 공주는 아무런 대비도 못하고 자리만 지킬 뿐이었다. 무언가 할 수 있는 걸 다 해봐야 했다. 그 무엇이라도 상관 없었다.
고드프리 왕자에 대한 걱정과 죄책감이 공주의 마음 속을 가득 메웠고 토르에게도 같은 심정이었다. 공주의 눈 앞에는 토르가 전쟁에 나서며 개리스 왕이 미리 파 놓은 함정에 빠지는 모습을, 그리고 그 속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모습이 계속해서 떠올랐다. 무슨 수를 써서든 토르를 도와야 했다. 이렇게 앉아만 있는 스스로의 모습을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다.
공주는 마침내 자리에서 일어서서 방 밖으로 걸어갔다.
“어디를 가세요?” 오랫동안 기도를 올린 탓에 목이 쉰 일레프라가 거친 목소리로 공주에게 물었다.
그웬 공주는 고개를 돌려 일레프라를 바라봤다.
“곧 돌아올게.” 공주가 대답했다. “내가 꼭 해봐야 할 게 있어.”
공주는 오두막의 문을 열고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해가 지는 저녁 노을이 눈이 부셔 공주는 두 눈을 깜빡였다. 하늘은 붉은 빛과 보라 빛을 뿜으며 저물어갔고 두 번째 태양은 저 멀리 수평선에 걸려 있었다. 문 밖에는 아코드와 펄톤이 보초를 서고 있었다. 두 사람은 공주의 등장에 자리에서 일어나 걱정스런 표정으로 공주를 바라봤다.
“왕자님은 살 수 있나요?” 아코드가 물었다.
“잘 모르겠어.” 공주가 대답했다. “여기 계속 있어줘. 보초를 서줘.”
“어디로 가십니까?” 펄톤이 물었다.
핏빛으로 묽든 듯한 하늘과 알 수 없는 신비한 느낌을 전달하는 공기를 마시며 공주는 마음 속으로 한 사람을 떠올렸다. 공주를 도와줄 수 있는 한 사람을 생각해냈다.
아르곤.
만약 아직까지 그웬 공주가 믿을 수 있는 누군가가 남아 있다면, 토르를 아끼고 선대 맥길 왕에게 충성을 바친 사람이 남아있다면, 공주를 도울 수 있는 힘을 가진 누군가가 있다면, 그건 바로 아르곤이었다.
“특별한 누군가를 찾아봐야겠어.” 공주가 대답했다.
공주는 뒤돌아 황급히 평야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공주의 걸음은 점점 빨라져 어느새 아르곤의 거처를 향해 달리고 있었다.
꽤 오랜만에 찾아가는 아르곤의 거처였다. 어린 시절 한 번 와본 게 전부였지만 공주는 기억을 더듬어 그가 황량하고 험준한 평원 한 가운데 살고 있다는 것을 떠올렸다. 공주는 계속해서 쉬지 않고 달렸고 숨이 계속 차오를수록 평야는 점점 험준해졌다. 잔디는 자갈 밭으로 바뀌었고 어느새 자갈 위로 커다란 돌 더미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바람이 휑했다. 달리면 달릴수록 주변 풍경이 으스스하게 변해갔다. 그 모습이 마치 별 위를 걷고 있는 득한 착각을 하게 만들었다.
공주는 마침내 아르곤의 오두막에 도착했다. 숨이 턱 끝까지 차 올랐지만 공주는 지체하지 않고 문을 두드렸다. 문을 두드리는 문고리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러나 공주는 이곳이 아르곤의 거처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아르곤!” 공주가 외쳤다. “저에요! 맥길 왕의 딸이요! 저를 좀 들여보내주세요! 명령이에요!”
공주는 계속해서 문을 두드리고 또 두드렸지만 아무런 기척도 없이 황량한 바람만 불어댔다.
결국 공주는 참았던 울음을 터트렸다. 온 몸이 탈진한 상태였고 아무것도 못하는 무력한 자신의 모습에 속이 상했다. 공주는 더 이상 갈 곳을 잃은 사람처럼 큰 공허함을 느꼈다.
태양이 하늘 아래로 자취를 감추며 핏빛으로 붉게 물들었던 노을에 황혼이 찾아왔다. 공주는 다시 뒤로 돌아 언덕을 내려갔다. 길을 걸으며 공주는 눈물을 닦아냈다. 이제는 대체 어디로 가야 하는지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게 알고 싶었다.
“부탁 드려요, 아버지.” 공주가 눈을 감고 허공에 소리쳤다. “제게 신호를 보내주세요.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려주세요.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려주세요. 제발 고드프리 오빠가 저렇게 죽게 내버려두지 마세요. 그리고 토르가 죽게 내버려두지 마세요. 저를 사랑하신다면, 대답해주세요.”
그웬 공주는 다시 침묵했다. 그리고 바람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길을 걸었다. 그러던 순간 마침내 어떠한 영감이 공주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호수. 슬픔의 호수.
그랬다. 슬픔의 호수는 생사의 기로에 놓인 병마와 싸우고 있는 환자를 위해 기도를 올리러 가는 곳이었다. 그곳은 하늘을 찌를 듯 높이 솟은 나무로 둘러싸인 태초의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한 레드우드 속 작은 호수였다. 사람들은 그곳을 신성한 장소로 섬겼다.